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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Mar 18. 2018

스포트라이트

기사 끝 이름의 무게

 영화 <스포트라이트>는 보스턴 글로브의 ‘스포트라이트’ 팀이 가톨릭 보스턴 교구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취재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성추행’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다루는 데 있어서 영화는 시간적으로나 시각적으로 가장 먼 곳에서 움직인다. “저 친구는 운이 좋죠, 살아있으니까.” 스포트라이트 팀이 피해자의 면담을 진행하면서, 그들과의 연결을 도운 변호사 ‘개러비디언’의 말이다. 장면 끝에 던진 한 마디 말을 통해 긴 시간동안 피해자들의 삶을 갉아먹은 신체적, 영적인 학대에 무거운 방점을 단다. 이렇듯 사건의 현장에서 터져 나온 눈물이나 시각적 충격 없이도 사건의 파장을 전해주며 피해자들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가톨릭 교구를 향한 분노, 진실을 향한 간절함을 일으킨다. 

 영화는 첫 장면에서부터 사건의 비극을 함축한다. 성추행을 당한 아이의 부모와 교회의 협상이 이루어진 장소는 다름 아닌 경찰서이다. 경찰의 어깨너머로 차를 타고 사라지는 교회 측 사람들을 비추며 이 사건이 공권력의 범위 밖, 그 그늘 아래서 ‘방관’이라는 이름으로 썩어가고 있는 공동체의 일부라는 점을 시사한다. 보스턴 글로브가 사건에 접근하는 시각 또한 점차 개인에서 공동체로 자리를 넓혀간다. 그들은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과학자들과 같다. 진실을 파헤치고 가장 진실과 가까이 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쥔 이 투명하고 변하지 않는 진실 하나가 공동체 속에서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는지, 그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그렇게 보스턴 글로브의 기자들은 가장 표면적인 시선인 ‘운 좋게 살아남은’ 피해자들의 목소리와 가해 신부의 폭로에서부터 은폐를 반복하는 교회의 시스템, 끝내는 방관이라는 이름으로 사건을 덮은 공동체에게 사건이 촉발한 질문을 던진다. 독자들에게 ‘알 권리’라는 가장 기초적인 만족을 넘어서 ‘필수적’인 언론이 되기 위해서 가져야할 자세가 무엇인지 영화는 추가적인 감정적 양념을 최대한 줄인 채 진실을 향한 기자들의 분주한 발걸음으로 증명한다. 

 스포트라이트 팀 안에서는 주연도 조연도 없다. 진실을 밝히려는 모두가 동등한 무게로 그려진다. 진실을 은폐한 자에 대한 분노, 종교라는 이름에 대한 불신과 진실 앞에 무너질 신도들의 순수한 믿음에 대한 우려 등 스포트라이트 팀의 개인은 그들이 맡은 사건이 가져올 감정과 사회적 질문들을 담당한다. 그 중에서도 스포트라이트 팀의 수장인 ‘월터 로빈슨’은 자신의 과오를 되잡는 철저한 반성의 길을 걷는 사람이다. 그는 대도시부에서 근무할 때, 성추행 신부 20명의 명단을 받고서도 후속기사 없이 제보를 덮어버린 과오를 짊어지고 있다. 그가 자신의 입으로 밝힌 그의 과오는 하나의 개인이 대변하는 언론, 공동체의 몫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가 걸은 고독한 반성의 길은 ‘몰랐다’고 말하는 모두에게 한 사람 분의 방관의 무게를 지게 한다. 홀로 짐을 지고 걸어온 월터에게 배런은 “우린 늘 어둠 속에서 넘어지며 살아요. 갑자기 불은 켜면 탓할 것들이 너무 많이 보이죠.” 라며 위로의 말을 건넨다. 기사 끝에 적힌 이름으로 개인의 무게를 다하며 대중들에게 진실의 빛을 전하는 사람들을 향한 위로다. 그리고 그들이 밝힌 빛 아래서 ‘넘어지며’ 살아온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조명한다. 영화가 끝난 후 달린 가해자들의 이름, 그것을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우리의 몫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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