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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Aug 10. 2018

어느 가족

어쩌면, 진짜 가족.

  영화의 시작은 아기자기한 긴장감이 흐르는 좀도둑질로부터 시작한다. ‘오사무’(릴리 프랭키)와 소년 ‘쇼타’(죠 카이리)의 소소하지만 치밀한 공동 작전은 오늘도 성공이다. 그들은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완벽하게 물건을 훔쳐냈고, 사람들은 나중에야 고개를 갸웃거리며 빈자리의 이유에 대해 잠깐 고민하고 말 것이다. 

  성공적인 도둑질로 들뜬 오사무와 쇼타는 추운 겨울 문밖에 놓인 소녀를 발견하고, 방금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주워온다. ‘유리’ (사사키 미유)가 집 안에 들어서자 저녁을 먹던 가족들은 새로운 아이에 모두 들뜬 기분이다. 추운 겨울 작은 집에 모여앉아 정신없이 각자의 대화들을 하며 식사하는 장면. 유리와 함께 관객들도 이 가족을 처음 만나는 장면이자, 추운 겨울 모여 앉은 그들의 온기를 가득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영화는 이 가족을 이렇게 보여준다.      



  - 어쩌면, 진짜 가족.


  이 가족은 ‘필요’에 의해 모인 가족이다. ‘하츠에’(키키 키린) 할머니의 연금을 중심으로 오사무와 ‘노부요’(안도 사쿠라)가 부부의 역할로 자리하고, 각자 다른 곳에서 모인 ‘아키’(마츠오카 마유), 쇼타, 유리가 자식처럼 구성되어있다. 하지만 누구도 혈연을 흉내 내지 않는다. 오사무는 쇼타에게 ‘아빠’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기는 하지만 강요하지 않는다. 노부요 또한 그건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며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 이들의 유대는 정의 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는 시간으로 끈끈하게 채워진다. 

  혈연이 빠진 이 가족은 그 빈 공간을 상처와 행복을 공유하면서 채워나간다. ‘린’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은 유리와 노부요는 함께 목욕을 하며 다리미에 데인 상처를 공유한다. 상처를 입은 상황은 다르지만 같은 곳에 있는 상처를 공유하며 그들은 깊은 유대감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의 상처를 다독이는 린의 손길에 노부요는 ‘선택받은 엄마’로서 그 어느 모성보다 깊은 모성을 느낀다. 노부요와 아키는 행복을 공유하며 연결된다. 한 여름 쏟아지는 비와 땀에 푹 젖은, 농밀한 성적 감흥이 가득했던 어느 날. 노부요와 오사무는 사랑을 나눈다. 식(食)과 성(性)이 어지럽게 섞인 진한 여름. 아키도 자신과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을 만나 사랑을 나눈다. 둘은 부엌에서 소탈하게 남자 이야기하며 사랑의 뜨거운 부분이 주는 행복을 공유한다. 

  이 가족은 외부의 사람들이 ‘필요’ 혹은 ‘이용’이라고 말하는 관계를 ‘선택’이라고 말한다. 노부요는 “스스로 선택하면 유대가 더 강하지 않겠어?”라고 하츠에 할머니에게 말한다. 그리고 할머니는 “나도 널 선택했지.”라며 화답한다. 영화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맺어져 혈연으로 규정된 가족은 차갑고 상처가 가득한 관계다. 린에게 학대를 일삼았던 부모들도 그랬고, 밝고 완벽한 동생만 존재하고 부족한 자신은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아키네 가족 또한 그랬다. 할머니도 죽은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나 떠났던 이력이 있고, 노부요의 전남편과의 관계도 비극으로 치달았었다. 어쩌면 버려져서 가족의 기억이 없는 쇼타가 가장 상처가 적은 인물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들은 과감히 혈연을 버리고 서로를 주웠다. 서로를 선택한 그들의 사이는 피로 맺어진 현대의 어느 가족들 보다 단단한 유대와 사랑으로 맺어져 있다. 

  선택은 이들을 외적 조건들은 부족하지만 내적으로는 충만한 사람들이라는 걸 보여주기도 한다. ‘취향’이 드러나는 대사들이 그렇다. 바다에 놀러가기 위해 옷을 고르는 장면에서 “여름엔 역시....” 라던가 “갈색머리니까 노란 게 어울리지 않을까?” 같은 말들은 사회에서 희미하게 살아남고 있는 그들을 마냥 헐떡거리고 가난에 눌려 ‘선택의 취향’마저 없는 절박한 사람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들이 ‘취향’을 잃지 않았던 것은 혼자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적으로 충만하고 평등한 관계가 개인의 인간적 취향을 지켜냈고 물건을 훔치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각자의 취향을 이야기 하며 소소한 웃음을 남긴다. 

  영화 속 중요한 것들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영화 초반 유리 앞에 가족이 소개되는 장면에서 노부요는 목소리로만 존재감을 드러낸다. 화면이 비추는 공간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보이지 않는 공간을 확장하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사람의 존재감을 더욱 크게 만든다. 그렇게 들여다보게 된 가족의 모습에서 노부요는 이 관계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가족의 일상에 그리고 가족의 존재에 책임을 다하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또 ‘소리만 들리던 불꽃놀이’는 그들의 행복은 ‘보이지 않는 것’에 있다는 걸 보여준다. 한 곳에 앉아 하나의 소리를 보며 각자의 머릿속에서 그려 넣는 불꽃놀이라는 큰 그림을 공유하는 것. 그것이 이들의 살아온 방식이자 이들의 행복이다. 

  영화에는 말하였지만 말하여지지 않는 말들이 있다. 이 말들은 입모양으로 한 글자 한 글자 관객들의 마음에 새겨진다. 하츠에 할머니가 바다에서 가족들에게 남긴 ‘다들 고마웠어’라는 말, 쇼타가 버스 안에서 고개를 돌려 보이지도 않게 멀어진 오사무에게 하는 ‘아빠’라는 말이 그렇다. 제 때 닿지 못한 말. 이 특별한 가족이 유일하게 평범했던 순간이 이 순간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소리 없이 부른 말에 담긴 짙은 애정은 어느 가족도 쉽게 닮기가 어려울 것이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말을 하는 이들은 이들 자체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감독이 <아무도 모른다>에서 사회 시스템에서 누락된 아이들의 삶을 그렸다면, 이번에도 사건을 바탕으로 사회가 외면했던 낱알 같은 사람들을 그려낸다. 쇼타는 극 중에서 ‘스위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작은 물고기들이 모여 거대한 물고기 모양을 만들어 큰 참치를 몰아낸다는 이야기다. 쉽게 쇼타가 속해있는 가족이 떠오른다. 사회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모양을 만들어 혹독한 삶이라는 파고를 버텨나간다. 스위미 이야기에서 중요한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각자 위치를 지켜야’ 큰 물고기가 되어 헤엄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극 중의 가족도 각자 자신의 몫을 최대한 해낸다. 한 번에 도둑질에 쇼타는 물론 어린 린까지 함께 하는 가족. 린까지 도둑질을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질문에 노부요는 “린도 우리에게 도움이 되어야 같이 살기 편하지 않겠냐”고 답한다. 이들은 엄마, 아빠, 자식, 할머니 등의 이름이나 역할로 종속되지 않으면서 가족의 일을 해낸다. 이렇게 이들은 스위미 이야기처럼 가족이면서도 하나의 독립된 개인으로 톱니처럼 서로 얽혀있다. 그래서 쇼타의 돌발적인 선택은 이들 가족을 순식간에 무너뜨린다. 

  겉보기에 ‘돈으로 뭉친’ 이 가족이 뭍으로 드러났을 때, 사람들은 ‘보통’의 일관된 잣대로 이들을 와해시킨다. 그 과정에서 어른들은 현실의 벽 앞에서 각자의 자세를 취하며 멈추고, 아이들은 그 틈바구니 사이에서도 자라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오사무와 쇼타의 관계에 대해서 어느 순간 쇼타의 성장이 오사무를 앞질러간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오사무는 슬픈 아버지상이라고 말한다. 쇼타가 성장하는 계기는 그가 주로 물건을 훔치던 가게 할아버지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여동생한테는 이런 일 시키지 마.”라는 말에 쇼타는 태어나서부터 젖어있었던 훔치는 일에 대한 도덕적인 생각, 그리고 그 굴레 안에서 나도 선택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눈을 뜬다. 그리고 한 번의 도둑질은 거절하고, 한 번의 도둑질은 선택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앞으로의 도둑질을 끊어버리는 선택이 된다. 

  오사무를 앞질러 가는 쇼타의 모습은 두 사람이 놀이를 하는 장면에서도 나타난다. 갑작스레 생긴 여동생의 존재로 혼란스러워 하는 쇼타를 달래며 집으로 들어가는 장면. 집으로 돌아가다 말고 다리를 다친 오사무는 쇼타에게 장난을 건다. 다리를 절며 쇼타를 쫓는 오사무를 잡힐 듯 잡히지 않게 뱅뱅 도는 쇼타. 이 때도 쇼타는 오사무의 손 밖에 있었다. 그리고 이들 가족이 ‘사건’이 되어버린 후, 오사무가 자신의 입으로 아빠가 아니라 아저씨가 되겠다고 말한 날. 쇼타의 제안으로 두 사람은 눈사람을 만든다. 이제 다시 보기 힘들 것이라는 걸 아는 두 사람이 이번에는 각자 굴려온 눈덩이를 하나로 만든다. 하지만 하룻밤 새 그 눈사람은 녹아내린다. 두 사람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빠와 아들이 되었던 순간이다. 

  쥬리 또한 자신만의 관점이 생긴다. 폭력만 먹고 자라서 가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쥬리는 린으로 살아가면서 사랑과 유대를 배운다. 그리고 이번에는 농도 짙은 사랑을 먹고 자란 린이 선택을 한다. 친모의 폭행을 암시하는 행동에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는 노부요가 알려준 노래를 흥얼거리며 그 가족을 만났을 때처럼 틈 사이가 아니라 벽 너머를 본다. 일시적인 유대가 준 사랑은 쥬리를 한 뼘 더 키워냈다. 

  다시 낱알이 되어 흩어져버린 가족이 남긴 것은 무엇인가 하고 돌이켜 봤을 때, 그 시간 안에 자라난 아이들의 모습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대신한다. 그들은 흉내 내지 않고, 흉내 낼 수 없는 어쩌면 진짜 가족의 시간을 보냈던 것이라고. 현대에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들이 흘려버린 소중한 것들을 주워 모은 진짜 가족이었다고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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