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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Apr 09. 2017

나, 다니엘 블레이크

제도가 지워버린 개인에 대하여

 주인공 댄은 심장마비를 한 차례 겪은 이후 의사에게서 당분간은 일을 하면 안된다는 처방을 받게 된다. 이에 댄은 질병수당을 지급받기 위해 심사를 의뢰하지만, 의사가 아닌 의료전문의의 판단에 따라 신청이 기각 당한다. 기각 이후 재심사를 위한 과정에서 댄은 복지센터에서 우연히 혼자 아이 둘을 키우는 케이티를 만나 그녀를 돕게 된다.

 복지 정책은 두 사람을 계속해서 분류하고 밀어내고 지워가지만, 댄은 자존과 인간애를 지키며 사람들을 돕고, 자신을 밀어내는 제도에 ‘물고 늘어짐’으로서 대항한다.     



- 제도가 한 개인을 지우는 과정

 영화는 처음부터 사람 간의 거리를 두며 시작한다. 수화기 너머로 의사가 아닌 정부가 고용한 파견업체의 의료전문가와 댄이 질병수당지급자격에 대해 체크한다. 질병수당지급 신청에서 기각당한 후, 상세한 도움과 안내를 구하러 복지센터로 가지만 그곳에서도 서면 신청이 아닌 인터넷 신청을 하라며 되돌려 보낸다. 콜센터, 파견직, 그리고 인터넷으로 제도는 계속해서 사람들에게서 거리를 두고 사람들을 밀어낸다. 인터넷을 이용할 줄 모르는 댄이 옆집의 청년에게 도움을 받아 신청서를 서면으로 인쇄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댄 그리고 우리는 복지제도가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댄이 케이티와 만나게 된 것도, 케이티가 당한 부조리함 때문이었다. 케이티는 집에 물이 새는 것을 항의했다는 이유로 집주인에게 쫓겨나, 노숙자 쉼터에서 머물다가 갓 이사를 온 상태이다. 복지센터는 그녀가 ‘정시출석 원칙’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지원 제재대상으로 분류했다. 이 밖에도 혼자서 두 아이를 키우는 케이티는 댄 보다 더 제도에서 빠르게 멀어지고 부식되어 간다. 밀려나기만 한 그녀의 가족을 지지해주는 것은 같은 처지인 댄 뿐이다.

 영화가 그리는 복지제도는 규율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분리하고, 정의하며 그들에게서 개인의 가치를 지워나간다. 접촉의 방식에서도 전화, 콜센터 등으로 관계와 유리되어 있다. 면대면 대화를 하더라도, 정시 출석 원칙이나, 잘못된 선례를 남긴다며 인간적 관계를 끊는 행동들을 통해서 복지를 필요로 하는 사람 개인의 가치를 지워나간다. 영화 속 복지는 제도가 놓쳤던, 혹은 제도 안에서도 힘든 생활을 하는 이들을 돕는 복지가 아닌, 그들을 제도의 낙오자들로 보고 그들을 안정된 선 밖으로 떨어뜨린 제도 안으로 다시 욱여넣는 복지였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국가체제는 복지라는 구제를 하고 있기 때문에, 완벽하고 견고하다. 따라서 책임을 (특히 구직수당을 받는) 개인에게 돌린다. 하지만 구직을 위해 남보다 눈에 띄어야 한다는 사실만큼이나, 일자리 부족 또한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현실이다. 영화는 복지의 면면들을 보여주며, 복지제도가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 개인들의 인간성은 유리되고 무시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 이름이 전하는 온기

 영화에서 사람들 사이의 온기가 피어나는 씨앗은 이름이다. 영화의 시작에서 ‘블레이크씨‘였던 아저씨가, 이웃집 ’댄’이 되었을 때, 내내 이름이 나오지 않던 두 아이의 엄마가 ‘케이티’라고 불렸을 때 우리는 사람이 놓인 처지가 아니라 사람이 보이게 된다.

 케이티가 식품지원센터를 방문했을 때 사람들은 먼저 그녀의 이름을 묻고, 부르며 도움을 주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내몰려 늪에 빠진 듯한 절망감과 수치심에 자기 자신을 잃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이름을 묻고 불러주었는지도 모른다.

 사무실에 유일하게 이름을 알 수 있는 앤도 유일하게 인간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다. 영화 말미에, 댄이 ‘나, 블레이크’라고 이름을 되뇌인 것도 개인, 한 사람의 가치를 밝히는 일이고, 그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 나, 다니엘 블레이크

 영화 후반부 댄이 앤에게, 계속해서 지원을 받으려 노력하는 일에 대해서,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수치심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사람이 자존감을 잃은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 이라고 말하며 모든 지원을 포기한다. 이어서 댄은 복지센터 벽에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으로 시작하는 항의를 선언하듯 적는데, 이것은 댄이 제도에 지워진 자신을 지켜낸 최후의 저항이다. 그가 벽에 그의 이름을 적자, 제도 속 지원 대상이 아닌 사람, 한 개인, 다니엘 블레이크가 보였다. 사람들은 ‘다니엘 블레이크’에게 응원과 환호를 보낸다.

 그가 항고 때 읽으려 했으나 끝내 읽지 못했던 글에서 댄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개가 아니라 인간이며, 인간적 존중을 요구한다. 나는 시민 이상, 이하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복지제도 아래 놓인 우리들 개개인을 밝혀낸 선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복지뿐만 아니라 체제, 관습에 눌려 자신을 잃은 많은 사람들의 가치를 비춰준 행동이었다.      


- 번호 매겨지는 삶에 대해서

 이 영화는 복지의 그늘을 비추고 복지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한 영화이다. 그 방향은 보다 인간중심적이며, 관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들었던 다른 생각은, ‘번호’매겨지는 우리의 삶이었다. 입학, 입시, 취업까지 우리는 번호 매겨지면서 자라왔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상처 입는 것은 나라는 존재 자체이다.

 빛나는 개인들의 사회가 되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인식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가치를 다른 곳에 두고 평생을 살아갈 수도 있는 사회에서 내가 지키는 내 이름, 그리고 나와 관계 맺은 사람들에게서 순수하게 살아있는 내 이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기억하고, 지키고 때에 따라선 선언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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