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창문

by 지지




김은 창문에 딱 달라붙어 팔을 크게 허우적거렸다. 처음 수영을 배운 사람처럼 우스꽝스러운 몸짓이었다. 반질반질한 거울 같은 창문은 김 씨 등 뒤의 하늘을 비춘다. 밑으로는 아찔한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다. 지금 여기서 떨어졌다가는, 말 그대로 뼈도 못 추리겠지. 지금 몇 층이야? 옆에서 창을 닦던 황이 물었다. 몰라. 김은 짧게 대답했다. 건물의 창은 모두 매직미러로 되어 있어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더라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다. 첫날 실장이 말해주었다. 그러니까 괜히 안을 보려고 기웃거리지 마세요. 건물 사람들이 불편해하니까. 황은 실장이 참 건방지고 친절한 구석이 없다며 투덜거렸다. 김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황의 험담을 듣기만 했다. 여러 일자리를 알아보았으나 죄다 떨어진 직후였던 김은 실장에게 책을 잡히고 싶지 않았다. 김은 일이 절박했다. 노인 일자리 사업에서도 미묘하게 소득 기준을 넘어 떨어졌고, 주차요원 자리나 경비원 자리는 꿈을 언강생심이었다.

내가 눈이라도 좋았으면 세어보는데.


황이 투덜거렸다. 어림 없는 소리. 김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금성빌딩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다. 허공에 붕 떠서 똑같이 하늘만 비추고 있는 건물을 무슨 수로 세겠는가. 이렇게 높은 건물을. 높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김은 저도 모르게 아. 가볍게 탄식을 내뱉었다.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었다. 겨우 진정되었던 다리가 또다시 벌벌, 정신 사납게 떨렸다. 김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며 땀을 닦았다. 황은 그런 김을 곁눈질로 보고는 혀를 찼다. 또 시작이구만. 황은 김이 고소공포증을 가졌다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입이 가볍고 얄밉게 떠들기를 좋아하는 황이 이 사실을 실장에게 전할까 불안했다. 그러나 황은 의외로 또 의리가 있어서 (이 사실 역시 황이 직접 제 입으로 말했다.) 말하지 않았다.


황은 김이 실장의 눈치를 너무 본다고 말했지만, 그러는 본인도 실장 앞에서는 행동거지를 조심하려 애썼다. 지난 달부터 실장이 작은 꼬투리가 잡히는 족족 직원을 해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정확하게는 해고가 아니었다. 모두 정규직이 아니었으니. 지역 일자리 창출에 앞장 서겠다던 금성빌딩은 이례적으로 들어서는 그 순간부터 노인 직원들을 대거 고용했다. 금성빌딩이 들어선 성탄시는 노인 인구가 많았다. 처음에는 조망권을 해친다는 이유로 부정적이었던 성탄시 사람들은 일자리가 생긴다는 기쁨에 이내 두손두발 들고 금성빌딩을 환영하게 되었다. 그리고 완공 1년이 지난 지금, 금성빌딩에 고용된 노인 직원, 그러니까 청소 노동자들 중 단 한 명도 재계약한 사람이 없다. 제일 먼저 걸레를 내려놓고 뛰쳐나갔던 심이 말했다. 우린 속은 거야. 심은 금성빌딩 근처의 집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금성빌딩이 들어서면서 재개발 구역을 지정되어 집을 팔게 되었다.


생각해보십쇼, 처음에 걔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집까지 찾아와서는, 멀정한 집에. 그놈의 주스까지 사갖고 와서는, 예? 집값도 후하게 쳐주고, 일도 시켜준다고 했지. 문제 없으면 재계약하니까 걱정 말라고 했잖습니까. 그런데……


심은 술잔을 누구 보란 듯이 파란 접이식 테이블 위로 탁, 내려놓았다. 심은 재개발된 새 아파트로 들어갈 돈이 없어 보상금으로 원래 살던 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 월세를 얻었다. 안정적인 기반을 잃어버린 느낌에 막막했지만, 살면 얼마나 살겠느냐는 막연한 생각과 일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다. 정규직으로 받아달라는 건 심 본인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여겼다. 안 그래도 일 구하기 어렵다는 젊은 사람들 자리를 빼앗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도 여겼다.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심은 습관처럼 그 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그러다가도 그래도,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라고 말했다. 황도 심의 말에 맞장구 치며 실장과 누군지 모를 높으신 분을 향해 욕지거리를 했다. 지들은 안 늙을 줄 아나…… 그렇지만 황은 심의 시위에 동참하지는 못했다. 김과 황은 심보다 일주일 늦게 계약했다. 이제 계약종료까지 일주일 남은 셈이다. 그래서일까, 어림도 없지 생각하면서도 속으로 둘 다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어쩌면 두 사람 정도는 계약 연장을 하지 않을까 하는.


실제로 봄이 되면서 창문은 자주 쉽게 더러워졌다. 중국에서 불어오는 모래 섞인 바람, 조경을 위해 마구잡이로 심은 꽃과 나무에서 나오는 꽃가루가 봄비를 먹고 창문에 딱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실장은 지저분한 창문 탓에 민원이 자주 들어와 여간 골치가 아니라 말했다. 아직은 창문을 닦을 사람이 필요할 것이라고 김과 황은 생각했다. 함께 일하는 다른 동료들도 말은 안 했어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평균 나이 65세의 이들이 갈 수 있는 다른 곳은 없었다.


내려가자고!


저 끝에서 누군가 외쳤다. 그 말과 함께 덜컹, 하는 소리가 나더니 외부 승강기가 아래로 천천히 움직였다. 속이 허한 느낌에 난간을 꽉 잡은 김이 눈을 한 번 감았다 떴을 때, 그의 앞에는 열린 창문이 있었다.


38층이네.


황이 말했다. 또다. 오늘도 창문이 열려 있다. 김은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한 달 째 38층의 오른쪽 창문을 못 닦고 있다. 점심에는 창문을 닦으니 꼭 닫아달라고 말을 해도, 38층의 창문만은 늘 열려 있다. 다른 층에서도 간혹 깜빡하고 열어둘 때가 있지만 38층은 아니다. 일부러 열어두기라도 하는 건지, 점심시간의 38층 창문은 항상 활짝 열려있다. 김은 헛기침하며 창문 안을 들여다보았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지난 주에도, 지지난 주에도 창문으로 들여다본 38층의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안에 사람이 있었다. 타닥타닥, 키보드를 치고 있는 건지 머리를 높게 올려묶은 여자가 창문을 등진 채 벽 쪽에 앉아 있었다. 여자를 보는 순간 김은 생각했다. 오늘이다! 오늘이야말로 앓던 이 같던 창문을 닦겠구나. 김은 여자가 놀라지 않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봐요, 여기 창문 좀 닫아주세요.


그러나 여자는 미동도 없었다. 김은 너무 작게 불렀나 싶어 목소리를 높였다.


저기요! 창문 좀 닫아줘요!


좀처럼 말이 없는 김이 큰 소리를 내자 창문을 닦던 동료들이 일제히 김을 보았다. 여자는 돌아보지 않았다. 바로 옆에 있던 황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시하는 거 같은데. 내버려둬.

……

하여간 요즘 젊은 것들은.

아니야, 소리를 못 듣는 사람일 수도 있지.

에이.


황은 따로 뒷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람이 어디 많나. 그렇게 말하려던 것 같았다. 김의 애타는 부름에도 여자는 돌아보지 않았다. 결국 38층의 창문은 또 닦지 못했다.


일을 마치고 건물을 나올 때, 김은 몇 사람과 서서 시위하는 심을 보았다. 심과 그의 동료들은 머리에 띠를 두르고 피켓을 들썩거리며 소리쳤다. 각성하라! 각성하라! 아는 체하기도, 모른 체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황은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며 김의 어깨를 툭툭 쳤다. 어쩌겠나, 우리는 일해야 하는데. 그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먼저 가버렸다.




오늘도 은진은 저녁을 걸렀다. 은진은 일을 시작하고 밥을 거르는 일이 잦아졌다. 벌써 한 달이다. 처음 은진의 취직 소식을 들은 날, 김은 어릴 적 은진이 좋아하던 메추리알조림을 사왔다. 오랜만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며, 아빠도 일하고 나도 일하니 앞으로는 더 좋아질 거라며 은진은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은진의 미소를 보며 김은 코끝이 찡했다. 은진이 직장을 구하기까지는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많았다. 수도권 4년제 대학을 준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니 곧 직장을 구할 거라는 기대와 달리 은진은 졸업하고 2년 동안 취직하지 못했다. 간혹 연락이 오는 곳도 없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전공을 살려 일한다는 게 쉽지 않은 것은 김도 은진도 알고 있었다. 청년들의 취직이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어려울 줄은 몰랐다.


내가 난청인이라 그런가봐.


평생 제 장애를 원망하지 않고 살아갈 것 같던 은진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그리 말한 것도 작년의 일이었다. 김은 그날 술을 많이 마셨다. 딸이 안타까웠다. 서류 면접을 통과하는 일이 없었다. 만나보면 다를 텐데, 은진은 후천적 난청인이라 의사소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장애등급을 괜히 받았다며 김은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했다. 그날 김은 그만 마시라고 말리는 은진에게 무리하지 말라고 말했다.


직장에서 일하는 게 전부는 아니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일주일 지나 은진은 직장을 구했다.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서 하는 건지 은진은 말해주지 않았다. 먼저 물으면 모른 척 화제를 돌리거나 자리를 피했다. 서운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언젠가 이야기해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김은 기다렸다. 하지만 은진은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말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묻기도 더 어려워졌다. 일이 많이 힘든 것인지 은진은 퇴근 후면 항상 녹초가 되어 집으로 들어왔다. 금방이라도 녹아서 흘러내릴 것처럼 온몸에 힘이 없는 딸을 보며 김은 혼자 애가 탔다. 저녁을 거르기도 일쑤였다. 무언가 같이 얘기할 거리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이럴 때면 먼저 떠난 아내가 생각났다.


아내와 은진은 마음이 잘 맞았다. 멀리서 보면 모녀지간이 아니라 단짝친구처럼 보였다. 아내와 은진은 함께 영화 보러 다니기를 좋아했다. 한 번은 ‘무비데이’라고 해서 조조영화로 시작해 심야영화로 끝낸 날도 있었다. 말 그대로 하루 온종일 영화만 본 것이다. 아내는 극장에 갈 때마다 매대에 꽂힌 작은 포스터를 기념품처럼 수집했다. 은진이 어려 함께 보지 못한 영화는 따로 클리어화일을 만들어 보관했다. 이유를 물으니 아내는 보고 재밌었던 영화니까, 나중에 같이 보러 갈 거라 말했다. 아내가 만든 클리어화일을 넘겨 보면서 은진은 중학생 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은진의 청력이 약해졌어도, 아내와 은진은 함께 영화를 보러 다녔다. 주로 자막이 나오는 외국 영화를 많이 보았다. 그래서일까, 아내는 병상에 누워서 영화 보러 가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었다. 은진이 그럴까? 엄마, 우리 영화 볼까? 말하자 아내는 갈라진 입술을 힘겹게 떼며 말했다.


한국영화가 좋겠어.


나이가 드니까, 눈이 침침하고 아파서 자막을 따라갈 수가 없어. 아내가 말했다. 은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한국영화 보러 가자. 몇몇 장면은 어렵더라도 전혀 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보러 갈 수는 있다. 다만 소리가 들릴 때 보던 영화와 지금의 영화가 너무나도 다를 뿐이었다. 은진은 아내의 손을 쓰다듬고 있었다. 아기 때부터 은진은 아내의 손을 만지길 좋아했다. 뼈가 도드라지게 보이는, 이제는 정말 가죽밖에 남지 않은 앙상한 손. 아마 지금 저게 은진이 보는 영화인 거겠지, 김은 생각했다. 그래서 김은 섣불리 영화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그러나 영화를 제외하고 김이 아는 은진이 좋아하는 것은 아주 어릴 적 은진이 잘 먹던 메추리알조림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 아내의 병간호에 치중하느라 딸에게는 마음을 쓰지 못했다. 그 간극이 미안해서 더 노력하고 싶었지만, 김은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금성 영화관에서 배리어프리 영화를 상영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게 뭔데?


황이 심드렁하게 대답하고는 세정제를 칙칙, 창문에 뿌렸다. 김은 잔뜩 들떠있었다. 텔레비전에서 본 그대로 말해주었다. 화면을 못 보는 사람이 알 수 있게 말로 설명해주고, 또 못 듣는 사람이 알 수 있게 소리를 자막으로 보여주는 영화야. 황이 창문을 박박 닦으며 못마땅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게 왜 필요해? 김은 창을 닦다가 홱 고개를 돌려 황을 보았다.

이 사람아, 자네도 나도 눈이 안 좋은데. 누가 라디오처럼 얘기해주면 좋잖아.

씁, 그런가?


김의 단호한 말에 황이 마지못해 말했다. 그런데 너무 힘주어 말한 탓일까. 찌르르 방광이 아팠다. 김은 저도 모르게 모든 행동을 멈추고 다리를 살짝 오므렸다. 또 시작이다. 오늘 기저귀를 하고 오기를 잘했다. 승강기에서 내리자마자 기저귀를 갈아야겠다고 김은 생각했다. 축축하게 젖은 기저귀가 묵직해진 것이 느껴졌다. 아무도 모를 텐데도 김은 귓불이 뜨거웠다. 나이가 들면서 몸 이곳저곳이 쑤시게 된 것쯤이야 참을 수 있었지만, 원할 때 소변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건 수치스러웠다. 벌써 몇 달째 전립선비대증 약을 꾸준히 먹고 있지만, 좀체 차도는 보이지 않았다. 기저귀는 마지막 자존심이라 생각하고 하지 않으려 했지만, 길에서 지릴 뻔한 이후로는 창문을 닦을 때는 꼭 차고 다닌다. 오롯이 혼자 감내해야 하는 굴욕인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한숨이 나왔다.




일을 마치고 김은 5층 금성 영화관에 들러 매표소를 찾았다. 화장실이 먼저냐, 매표소가 먼저냐. 당연히 화장실을 들렀다 가면 되는 일이었지만 김의 마음은 일하는 내내 김의 몸보다도 더 붕 떠서 매표소에 가 있었다. 빨리 표를 끊고 싶었다. 간절하게 기다렸던 영화인 만큼, 다른 사람들이 예매해서 빨리 자리가 동날 것 같았다. 처음 매표소 직원은 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뭘 예매하러 오셨다고요?


배리어프리 영화요, 배리어프리.


짜증이 가득한 직원을 보며, 김은 혹시나 이름을 잘못 알고 온 것은 아닌가 싶어 초조해졌다. 직원은 뒷사람에게 무어라 말하며 물어보았다. 그 앞에서 김은 어떤 말도 듣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서서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고 직원이 물었다.


<눈> 예매하러 오신 거 맞죠?

눈이요?

저희 상영하는 배리어프리 영화가 <눈>밖에 없어요. 그거 맞죠?


어휴, 답답해. 직원이 말끝에 작게 중얼거렸다.


네, 네. 맞습니다. <눈>이에요.


하기사 영화 이름이 배리어프리 영화는 아니겠지. 그제야 그 생각이 들었다. 차고 있는 기저귀의 묵직함을 잊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배리어프리 영화가 한다는 것만 알았지, 김은 영화의 제목도 내용도 몰랐다.


23일 12시 45분 영화 <눈>, 예매하는 거 맞으시죠. 자리는 어디가 좋으세요?

저어, 다른 날 다른 시간은 없습니까?

특별 상영 영화라서 그날 그 시간밖에 없어요.


하필이면 딱 일하는 시간과 겹쳐 있다. 이런 시간이라면 다른 사람들도 보러 오기는 좋지 못할 텐데. 모니터의 좌석 선택 화면을 보니 텅 비어 있었다. 김은 낭패란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재계약 시점이 다가와서 조심해야 하는 마당에 일을 빠지고 은진과 영화를 보러 가면 어떤 꼬투리를 잡힐 지, 안 봐도 뻔했다. 게다가 이 일에는 휴가라는 게 없었다. 김은 고민하다가 적당히 중간 자리를 고르고 표를 받았다. 김은 표즐 구겨지지 않게 재킷 안쪽에 넣었다. 직원은 끝까지 불퉁했다. 김이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물을 때는 더 불쾌한 얼굴이었다. 지린내라도 맡은 걸까. 근래 들어 은진도 자주 김에게서 냄새가 난다고 말했으니 어쩜 그럴지도 몰랐다.


직원이 알려준 대로 왼쪽으로 돌았지만 화장실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한참 돌고 돈 후에야 남자가 나오는 걸 보고 화장실인 줄 알았다. 문 옆에 아주 작게 ‘MAN’이라고 적혀 있었다. 남자는 여간 화가 난 게 아닌지, 갑자기 불쑥 멈춰 서더니 화장실 안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그 바람에 김은 놀라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니, 왜 남자 화장실을 여자가 치워? 기분 잡쳤네.

화장실 안으로 들어선 김은 입구가 아닌 안쪽에 세워진 청소중 표지판을 보았다. 그리고, 입구를 등진 채 등을 굽히고 대걸레를 빠는 여자를 보았다. 온몸을 써서 들썩거리는 모습을 여자를 본 김은 다시 그대로 돌아서서 나왔다.

집으로 돌아온 김은 영화표를 편지봉투에 넣어 옷장에 보관했다. 아직 은진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한창 이력서를 여기저기 넣고 다니던 시절, 은진은 말했다. 괜찮아, 아빠. 나는 실망하는 일에는 익숙해. 김과 아내는 은진에게 평등과 사랑을 가르쳤다. 세상은 선한 것들로 가득 찬 것처럼 말했다. 아직 어린 아이에게 세상의 부조리한 면을 알려주는 건 이르다 생각했다. 크면 자연히 알게 될 거라 여겼다. 세월이 흘러 자란 은진은 부부의 예상대로 천천히 세상을 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김은 그게 못내 마음 아팠다. 20대의 은진에게 이런 좌절은 너무 이르다는 생각도 들었다. 제게 주어진 부당한 것들은 그러려니 이 악물고 참아왔던 김이었다. 다들 이러고 사니까. 하지만 은진에게 닥친 일들은 은진만 그런 것 같아 억울했다.


김이 그런 속내를 내비칠 때마다 은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전부는 아닐 거라 믿어.


뭐가 전부가 아니라는 걸까. 김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정작 본인이 다부지게 말하는 데 찬물을 끼얹을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은진은 부지런히 공부하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고 발로 뛰며 자리를 알아보았다. 김은 은진이 가끔 낯설게 느껴졌다. 시금치를 먹기 싫다고 편식하던 아이가 자라서 시금치볶음을 만들고, 넘어지면 쉽게 울음을 터뜨리던 아이가 이제는 쉽게 울지 않는다. 자란다는 것, 성장한다는 것이 이런 것이다. 하지만 김은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출근하자마자 실장을 찾아가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곧 실장은 오전에 일이 있어 출근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승강기에 올라탔다. 방법을 찾아야지, 생각만 하던 중 <눈>의 상영일이 당장 다음날로 다가왔다. 정 안 되면 은진에게 혼자 보라고 표를 줘야겠다고 김은 생각했다. 그러니 미리 영화표를 줬어야 했던 건데…… 어째서인지 김은 영화표를 은진에게 주지 않았다. 오히려 곱게 접은 영화표는 재킷 안쪽에 있었다.


김은 깨달았다. 영화가 보고 싶다. 오랫동안 영화를 보지 못했다. 은진에게 보여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은진과 함께 보고 싶다. 그러려면 선택해야 했다. 양자택일이었다. 은진과 함께 영화를 보고 계약직을 잘리느냐, 계약직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일을 나가고 은진과 영화를 보지 못하느냐. 후자는 최악의 선택처럼 보였지만 김에게 어쩔 수 없는 미련을 남겼다. 심은 실장이 오늘 출근하지 않은 것도 창문 닦는 기계를 보러 간 거라고 했다.


포장마차에서 황과 우동을 먹던 중이었다. 시위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들렀는지 띠를 판넬을 든 심이 포장마차로 들어왔다. 평소라면 모른 척 그릇에 코를 박고 먹어버렸을 텐데, 하필이면 딱 눈이 마주쳤다. 그래도 함께 일하던 사이에 눈을 마주치고도 모르쇠를 하는 게 영 정 없이 느껴져서, 김은 큼큼, 헛기침하며 황의 그릇 옆을 작게 툭툭 치고는 고갯짓으로 심을 가리켰다. 어색하게 인사한 세 사람은 어느 새 함께 앉아 소주 한 잔을 시켜 나눠 마셨다.

형님들, 그거 아십니까.

그렇게 부르지 말래도.


심은 그들 중 가장 나이가 어렸다. 어리다고 해봐야 그도 이제 예순이었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형님 소리 듣는 게 가족도 아니고 쑥스러워 하지 말래도 심은 꼬박꼬박 형이라 부르며 존댓말을 했다.

이제 기계를 들여올 거라네요.

무슨 기계?

창문 닦는 기계요. 그러니 이제 끝났지요.


심이 말을 마치고 소주 한 잔을 한번에 들이켰다. 심은 그간 복직을 요구하며 끈질기게 싸워왔다. 그러나 이제 그 희망이 사라졌다. 창문 닦는 기계가 들어오면 심의 자리는 자연히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건 김과 황 역시 마찬가지였다.


계약 마치고 퇴직금도 받았겠다, 제가 이제 뭘 더 요구할 수 있습니까?


도의적으로는 옳지 못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법적인 책임은 없다고 변호사가 그럽디다. 안주가 없어 심에게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미 면을 다 건져 먹고 남은 우동 국물이라도 좀 먹으라고, 김은 슬쩍 그릇을 밀었지만 심은 고개를 저었다. 그날 심은 여러 번 그러면 안 되는 거야, 그러면 못 써, 사람이. 하고 술주정인지 뭔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김은 그가 안타까웠다. 황도 마찬가지인지 이 친구야, 하며 심의 등을 쓰다듬었다.


술에 취한 심을 택시 태워 보내고 김과 황은 집으로 걸어갔다. 헤어질 때 내일 보자며 황과 헤어졌다. 그래, 내일 본다. 김과 황은 내일도 볼 것이다. 계약 종료까지가 이틀 남았다. 기계가 들어와도 그들은 출근한다. 재계약이 성사되지 않을 게 뻔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출근한다. 어쩌면 기계를 관리할 관리자가 필요할지도 모르고, 구석구석을 닦지 못하니 사람이 필요할 수도 있다. 아주 작고 가느다란 그 희망을 두 사람은 버리지 못한다.


김은 아내가 죽기 전까지 소중하게 보관하던 영화 포스터를 모은 클리어화일을 생각했다. 아내는 영화를 향한 열망이 있었다. 우리 은진이랑 이걸 봐도 좋겠어. 누가 봐도 쇠한 몸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곧 죽을 것이다. 아내도 알고, 김도 알고, 은진도 알고 있었다. 영화를 본다고 해도 의미가 없었다. 아내와 은진은 더는 같은 감정을 공유할 수 없다. 영화의 음악과 소리, 몇몇 말들은 은진에게 닿지 않는다. 하지만 아내는 간절하게 소망했다. 은진과 함께 영화를 보기를.




외부 승강기는 이제 1년 다 되어가는데도 레버를 내릴 때마다 끔찍한 소리가 난다. 처음에는 께름칙해서 혹시 사고의 조짐이 아닌가, 하고 실장에게 말했었다. 하지만 실장은 점검 결과 아무 문제가 없었으며 단지 기계의 마찰음 때문이니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매번 들을 때마다 김은 무서운 상상을 했다. 김과 동료들은 헬멧을 쓰고, 외부 승강기에 몸을 연결해두었으나 그 외에는 그 어떤 안전 장비도 없었다. 외부 승강기가 떨어지면 그걸로 끝인 것이다. 창문 닦는 기계에서도 이런 소리가 날까? 김은 궁금했다. 하지만 기계는 생명이 없으니 괜찮겠지. 그게 기계를 사는 이유일지도 몰랐다.


오늘따라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불어 외부 승강기가 흔들거렸다.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닌데 오늘따라 더 무서워서 김은 손을 벌벌 떨었다. 아래를 쳐다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시선이 자꾸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아예 눈을 감고 창문에 걸레를 붙이고 쭉 밀고 당겼다. 허우적, 허우적. 김은 머릿속에 자신이 창문을 닦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누가 보면 하늘에 떠서 수영하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닦을수록 더 새파랗고 또렷해지는 하늘. 상상을 하다 보면 분명 철로 된 바닥에 발을 딛고 서 있는데도 몸이 떠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다리를 뻣뻣하게 두고 밀고 엉덩이만 우스광스럽게 움직인다.

내려가요!

멀리 들리는 소리에 난간을 꽉 붙잡고 덜컹, 소리와 함께 멈추기를 기다렸다. 찬 바람에 눈이 시려 눈을 깜빡였다. 흐린 시야로 베이지색 벽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벽을 등진 채 오늘도 머리를 높이 올려묶고 일하는 여자가 보였다. 키보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자는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38층이다. 38층의 열린 창문은 어느 샌가부터 일하는 김과 동료들에게 이정표가 되어 있었다. 아, 여기까지 왔구나. 땅까지 얼마 안 남았구나.

김은 여자를 부르지 않았다. 오늘은 창문을 닫아달라고 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바닥에 내려놓았던 세정제를 집어들고 허리를 폈다. 그리고 그 순간, 오금이 싸하게 저려왔다. 방광이 꽉 조이는 느낌. 금방이라도 지릴 것처럼 요도가 찌릿찌릿 아팠다. 갑자기 멈춰선 김을 황은 흘깃 보았다가 무심하게 제 앞의 창문을 닦았다. 기저귀를 하고 있으니 지리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이렇게 일을 하다가 요의를 느낄 것을 대비해서 일부러 기저귀를 하기 시작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김은 열린 창문을 보았다. 이 창문으로 넘어 들어가 잠깐 화장실만 다녀온다면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 동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하지만 근무 시간에 실장에게 보고도 없이 자리를 이탈하는 건 계약 위반이었다. 동료들은 은근히 예민해져 있었다. 기계를 관리한 인력은 지금 있는 사람보다 훨씬 적은 수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굴욕적이라도 문제 없이 넘어가려면 기저귀에 소변을 보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동료들에게 누를 끼치는 것도 좋지 않다. 망설이는 사이 힘이 잔뜩 들어간 발끝이 저려왔다. 말을 하고 가? 그냥 가? 말을 하고 또 양해를 구해야 한다. 아, 도저히 기다릴 수 없었다.


결국 김은 창문을 넘어버렸다.


창턱을 밟는 순간 느낌이 이상했다. 텅텅거리는 철판과 달리 단단한 바닥, 김이 창문으로 들어가자 옆에서 어어! 이 사람아! 뭐 하는 거야! 하는 새된 소리가 들렸다. 외부 승강기가 흔들거렸다. 김은 단단하게 바닥을 딛고 섰다. 김이 들어왔지만 여자는 반응하지 않았다. 얌전히 앉아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우스 위에 손을 얹은 여자는 지나면서 보니 밀랍인형 같았다. 김은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물으려다 말고 사무실 밖을 안짱걸음으로 걸어나갔다. 뒤에서 돌아오라는 황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돌아갈 수 없었다. 일단 들어온 이상, 김은 가야 했다.


다행히 화장실은 금성 영화관과 똑같은 곳에 있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김은 칸에 들어가자마자 고무줄로 된 츄리닝 바지를 훌렁 벗어내리고 변기에 앉았다. 오줌은 생각처럼 시원하게 나오지 않고 방울방울 똑똑 떨어졌다. 하지만 안심했다. 김은 자신을 둘러싼 좁은 벽과 딱딱한 바닥에 만족했다. 대변을 누는 사람처럼 끙, 하고 아랫배에 힘을 열심히 줬지만 소변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결국 일어나서 물을 내리고 바지춤을 올렸다. 그 순간, 밖에서 누가 들어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철벅거리는 소리, 질질 끌리는 소리. 아무래도 청소를 하려고 청소부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김은 머쓱하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거울로 보니, 그때 남자화장실을 청소하던 여자 같았다.


여자는 묵묵하게 대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김은 물이 세면대 밖으로 튀지 않게 조심스레 털고 바짓춤에 물을 슥슥 닦았다. 여자는 김을 등진 채 이제 김이 나왔던 칸을 정리하고 있다. 입구를 보니 청소중,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제대로 오줌을 누지도 못했는데 이상하게 몸이 가벼웠다. 짜릿거리며 괴롭히던 통증도 사라졌다. 김은 가뿐한 마음으로 자신이 들어왔던 창문을 찾아 여자가 있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창문으로 다가가보니 외부 승강기는 이미 내려가고 없었다. 창문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동료들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창을 닦던 황이 그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30층에서 봐!

그가 소리쳤다. 그리고는 다시 창문 닦기에 열중했다. 김은 그들 아래를 보았다. 시위하는 심과 심의 동료들이 보였다. 그들은 복직과 노동 환경 개선을 요구하고 있었다. 한쪽은 높은 절벽에 달라붙어 창을 닦고, 한쪽은 땅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김은 고개를 쭉 빼서 멍하니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고개 들어 제 앞을 바라보았다. 맑고 예쁜 하늘이 그 자리에 있었다. 금성빌딩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기도 했지만, 성탄시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기도 했다. 탁 트인 시야에 김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그동안 제 등 뒤로 이런 세상이 펼쳐지고 있는 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항상 비춰진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비친 하늘보다 더 새파란 하늘이 광광하게 펼쳐졌다. 김은 벅찬 기분으로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분 좋은 바람이 맞은편에서 불어와 창턱에 올린 김의 손을 매만졌다. 마음이 울렁거렸다.


오 분 정도 그러고 있었을까. 김은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30층으로 가야 한다. 가서 다시 외부 승강기에 타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밉보이지 않고, 어쩌면 재계약할 수 있을 것이다. 창턱에서 손을 내리고 돌아섰다.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모니터에서 눈을 뗄 줄 모르는, 키보드를 두드리는 여자. 그녀에게 김은 여전히 관심사가 아니다. 이쯤 되니 여자가 환상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김은 머뭇거리며 그 뒷모습에 대고 말했다.

오늘 날씨가 참 좋아요.




엘레베이터를 탄 김은 30층을 누르려다 말고 충동적으로 5층을 눌렀다. 어, 이게 아닌데. 머리로는 생각했지만 다시 눌러 취소하지 않았다. 대신 영화표를 꺼내 확인해봤다. 곧 영화 상영 시작 시간이었다. 12시 45분. 김은 기분 좋은 초조함에 다리를 떨었다. 때가 잔뜩 낀 손으로 표를 내밀고, 마침내 김은 영화관에 입장했다.


상영관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김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은진이 생각났다. 지금 은진은 뭘 할까. 점심 시간이라 밥을 먹고 있을까. 함께 보자고 말을 꺼낼 것을 그랬다. 광고가 나오면서 상영관 내부가 깜깜해졌다. 영화가 시작한 것도 아닌데 김은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마침내 시작 직전, 모녀로 보이는 두 사람이 팝콘을 안고 상영관에 들어왔다. 그들은 김보다 조금 앞자리에 앉았다.

영화는 푸른 하늘을 가득 담은 화면으로 시작한다. 소리가 나올 때마다 하나하나 세심하게 그 내용이 자막으로 떠올랐다. [눈이 내리는 소리] [아이들이 눈 위를 달리는 소리] [♪따뜻한 분위기의 음악이 시작] 김은 화면으로, 귀로 소리를 감각했다. 상상만 했었지, 어떻게 나오는지는 몰랐다. 하도 찾기 어려워서 대단한 기술이 들어가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조금 허무했다.


<눈>에는 한 가족이 나온다. 개구진 웃음이 서로를 똑 닮은 자매와 아이들을 사랑하는 젊은 부모. 눈을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고 부부는 다 같이 썰매장으로 향한다. 그런데 그곳에서 막내딸을 잃어버린다. 즐거웠던 시간, 화목했던 가정은 한 순간 상실로 무너진다. 가족은 딸을 찾기 위해 애쓰지만 딸을 흔적은 눈에 덮인 것인지 도무지 보이질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자매 중 언니가 동생을 잃어버렸던 썰매장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자신과 닮은 여자의 뒷모습을 본다. 리프트를 타는 그녀를 따라 저도 리프트를 탄다. 흔들거리는 여자의 다리를 보며 무서운 줄 모르고 붕 뜬 다리를 허공에서 흔들던 동생을 떠올린다. 눈이 내리고 언니는 하늘을 본다. 그렇게 영화는 끝난다. 50분 정도 되는 아주 짧은 영화였다.

엔딩 크레딧이 끝까지 올라갈 때까지 세 사람은 자리를 지켰다. 김은 엔딩 크레딧이 아니라, 모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엔딩 크레딧이 끝나고 모녀가 나가고 나서야 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앉아 있다 일어난 탓에 저도 모르게 휘청거렸다.




입구에서 김을 발견한 실장이 씩씩거리며 소리 쳤다. 이리 와! 잔뜩 화가 났는지 반말을 지껄이며 삿대질했다. 이상했다. 김은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실장을 지나쳐 태연하게 걸었다. 실장은 그 모습이 더 기가 막히는지 제자리에서 방방 뛰기까지 했다. 희미하게 욕하는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금방 시위하는 소리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지금 시간은 오후 두 시, 해가 딱 중앙에 떠 있을 시간. 제일 뜨거울 시간. 동료들은 외부 승강기에서 내려왔겠지. 실장이 점 만큼 보일 때쯤 김은 금성빌딩을 돌아보았다. 외부 승강기가 건물 아래쯤에 줄처럼 빌딩에 걸쳐진 게 보였다. 김은 생각했다. 결국 고장이 난 걸까? 아니면 나처럼 다들 창문으로 들어가버렸나. 후자가 더 유쾌하니 김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돈은, 퇴직금은 이제 어떻게 되나. 앞으로 닥칠 일들이 막막하기만 하다. 1년에서 하루를 남기고 이렇게 사고를 쳤으니 재계약은 당연히 하지 못할 것이다. 퇴직금은 어떻게 될까. 받을 수 있는 걸까. 손으로 차양을 만들고 외부 승강기를 보았다. 외부 승강기가 멈춘 층의 창문이 열려 있었다. 누군가 그 곁에 서서 두 손을 흔들고 있다. 필요한 장비가 있어 아래에 사인을 보내는 중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김은 어쩐지 그게 자신에게 보내는 인사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황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계속 모니터를 보던 여자일지도 몰랐다. 누구든 그저 반가웠다. 그래서 김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빌딩을 향해 서서 두 손을 크게 흔들었다. 창문을 닦는 것 같았다. 손을 흔들면 흔들수록 하늘을 점점 더 선명해졌다.




문예창작과를 복수전공하기 시작하면서 처음 썼던 소설입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변형해보는 과정에서 원본은 어디론가 휘발되었으나 그 당시 많은 비판을 들었던 것이 기억 납니다. 그 중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문장이 구리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때 제가 썼던 문장이 갓 지은 밥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런 문장이었을 텐데, 이를 보고 한 학우가 '좋은생각'과 같은 에세이에나 실릴 법한 문구라고 말했습니다. 좋은 생각이 나쁜 잡지라는 것도, 에세이가 나쁜 것이라는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깊은 고민 없이 문장을 썼다는 것이겠죠.


그 말은 오랫동안 저의 마음속에 박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소설을 쓸 때면 문장이 가장 자신이 없던 것이 기억납니다.


한 교수님께서는 그래도 노인이 창문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좋았다며, 신춘문예에 투고해보라고 조언도 해주셨었습니다. 예심은 오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가정하에 격려를 건네주셨었는데 그 당시 우울이 너무나 심했던 관계로 저는 기회를 놓쳤고, 빠르게 변화하는 소설의 물살에 지금 보니 이 소설은 구시대의 유물 같이만 느껴질 따름입니다.


최근 저는 제 문학의 길을 장애문학의 길로 규정하였는데, 그 씨앗이 이 소설에도 담겨 있는 것을 확인하니 신기합니다.


이 소설은 빌딩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모진 바람을 맞으며 그 안의 사람들을 위해 창문을 닦는 노인이 불쑥 그 창문 안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모든 문제의 매듭을 풀어주거나 행복을 주는 일은 아닐지언정 변화의 시작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적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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