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불멸의 화가 반 고흐> 전시회를 다녀오다
연말 느낌이 나지 않았다.
어제,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이브의 나는 침대 위에 앉아 노트북을 허벅지 위에 놓고 내내 글을 쓰고 책을 읽었다. 시국이 시국이다보니 연말이라고 해도 들뜨지 않았고, 새해 목표를 세우고자 하는 고양심도 들지 않았다. 그저 빨리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으로 멍하니 크리스마스 당일은 그래도 본가에 내려가 엄마와 함께 보낼 생각만 했다.
그러다 문득, 고흐가 생각이 났다. 무려 십이 년만에 내한하셨다는 그 분!
십이 년 전, 어릴 적 나는 예술의 전당에서 언니와 엄마와 셋이서 고흐의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처음으로 만난 두툼한 유화 앞에서 미심쩍게 서성이던 어린 내가 떠오른다. 우연히도 재활병원을 퇴원하는 내게 옆 병상 친구의 보호자 이모가 내게 준 책도 고흐에 대한 이야기여서 그 그림들이 더 와닿았던 것 같다.
엄마도 고흐의 내한 소식을 반기며 그림을 보러 가고 싶다고 말씀하셔서 날짜를 조율하던 중에 문득 내일도 개관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검색해보니 개관한단다. 정상운영이란다. 그 말에 나는 이번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깨달았다.
엄마! 우린 고흐를 보러 가야 해!
그렇게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미스터 반 고흐와 함께 보내게 된 것이다.
나는 정말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전에 예술의 전당에서 감상한 인상 깊은 전시회가 미셸 들라크루아 작가의 전시였으므로, 얼마나 또 화려하고 아름다운 그림들이 있을까 생각했다. 예컨대 고흐 하면 떠오르는 그림들이 있지 않은가. 대표적으로 <별이 빛나는 밤>에서부터 시작해서 동생 테오의 아이를 축복하며 그린 <아몬드 나무>, 타는 듯이 아름다운 <해바라기> 등등... 그 모든 작품이 오기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작품 정도는 있지 않을까.
하지만 땡, 그런 건 없었습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사람들이 으레 고흐라면 기대할 법한 대표작은 없었다. 있다면 포스터에도 전면적으로 내세워진 고흐의 자화상 정도가 아니었을까. 십이 년 전의 전시 규모에 비하면 전시는 다소 소박하게 느껴졌다. (아주 오래된 기억이라 희미한데도, 그때는 무언가 생생했던 느낌을 기억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게 또... 참 좋았다.
사람은 1등만 기억한다. 어느 비장한 누군가가 내뱉은 말처럼 우리는 달에 발을 디딘 첫 번째 사람은 기억할지언정 두 번째 사람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이것처럼, 사람들은 대표작만 기억한다. (대부분은.)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는 고흐의 드로잉에서부터 대표작에서 빗겨난 그의 그림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엄마와 나는 세세한드로잉에 감탄하고, 두툼하게 발린 물감의 질감에 감탄했다.
생전 고흐는 일본 그림에서도 영향을 받았는데, 그 분위기가 녹아든 그림도 있어 좋았다.
이번 전시에서 내가 가장 좋았던 고흐의 작품은 <양귀비, 수레국화, 작약, 국화가 있는 꽃병>이었다. 고흐의 정물화 하면 <해바라기>만을 생각하기 일쑤였는데 웬걸, 점잖으면서도 고혹적인 분위기를 빛내는 그 그림 앞에서 오래도록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엄마도 마음에 드셨는지 그 그림이 프린팅된 캔뱃지 굿즈를 하나 구입하였다.
어릴 적 재활병원에서 퇴원하며 옆 병상 보호자 이모에게 받은 고흐 책에서 나온 내용 때문에, 나는 <감자 먹는 사람들> 이라는 그림도 좋아하는데, 실제로 보게 되어 좋았다. 고흐는 투박한 손을 좋아한다고 했다. 노동하여 거칠거칠해진 그 손과 모습이 아름답다 생각하여 그림으로 남겼다고 했다. (동화가 전해준 내용임을 밝혀둔다.) 나는 엄마에게 소곤소곤 그 이야기를 전하며 씨를 뿌리는 사람, 밀짚 더미를 모아둔 들판 따위를 그린 그림들을 즐겁게 감상하였다.
이전 뭉크의 전시회에서도 최고로 좋아하는 <태양>은 보지 못했지만, <뱀파이어>의 드로잉 과정부터 완성까지 볼 수 있어 좋았던 것처럼 고흐의 전시회에서도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어 즐거웠던 크리스마스였다.
글을 맺으며, 인상 깊게 읽었던 고흐의 편지글 중 일부를 올려본다.
나는 늘 두 가지 생각 중 하나에 사로잡혀 있다. 하나는 물질적인 어려움에 대한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색에 대한 탐구이다.(188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