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애인 코스프레 그만두기

새해 목표

by 지지

장애를 극복하는 서사는 지긋지긋하다.


난 장애를 극복하는 게 정말로 되는 줄 알았다. 마치 산타가 존재하는 걸 믿는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속고 살았던 거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고학년 들어서 의사에게 "제가 건강해지려면 운동을 하면 될까요?"라고 물었다가 "뭔 소리야, 안 나아져. 그러니까 장애지." 라는 답변을 받고 아, 이건 '나아지는 게 아니구나'를 깨닫고 좌절했다.


주위를 둘러보면 비장애인들이 절대다수인 세상에서, 나는 장애가 겉으로 크게 티가 나지 않아서 비장애인 코스프레하며 사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장애가 점진적으로 드러나게 되면서부터 비장애인 코스프레가 버거워졌다.


YCmikEnhUACX9NhKv356hkDWQxkAYtPQuq0PGZuD9H1fLcSfCeWGoiseyi36wP3nBVsTF7-ieSIA1QCa6WoFHA.webp 혹시 이 캐릭터를 아시는지? 감자도리다.


불현듯 내가 감자도리처럼 느껴졌다. 감자도리는 2000년대 초반 플래시가 유행할 때 나왔던 캐릭터로, 고구마가 되고 싶은 감자 캐릭터다. 입고 다니는 특유의 빨간 후드는 고구마처럼 발갛게 되고 싶어 걸친 것이다. 감자도리 에피소드 중 하나로 월수입 200 전단지를 보고 홀랑 넘어간 감자도리가 알바에 지원했다가, 사실 알고 보니 그곳이 고구마매매를 하는 범법집단(!)이라서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자기 빨간 옷을 집어던지고 감자임을 밝히고 탈출한 에피소드가 있다. 그 에피소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감자도리가 자신이 감자임을 인정하는 에피소드인데, 이를 본 사람들은 어린이용 플래시 같은데 입맛이 씁쓸하다 말한다.


성인이 되고 나서 감자도리를 생각하면 얘는 왜 고구마가 되고 싶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돌이켜보면 자기 부모님부터가 고구마인데 자기만 감자니 당연했겠다 싶으면서도, 될 수 없는 것을 꿈꾸는 마음이 도대체 무엇인지 헤아리기 어려웠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장애인도 비장애인이 되고 싶을 때가 많지 않은가. 정말 솔직하게 말하자면.


하지만 걸친 옷도 혁명의 빨간 후드인데 너무 나약한 생각이다.


난 이제 비장애인이 되고 싶지 않다. 솔직히 비장애인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 때면 이제는 짜증이 난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해야 하지? 따지고 보면 나는 그냥 나로 태어난 온전한 나이고, 장애인과 약자는 하나도 고려하지 않은 채 시설과 건물 제반 등을 설계한 쪽에 더 잘못이 있는 거 아닌가? 이건 소송으로 가도 내 승리다.


근데 모난 돌은 늘 나다. 정 맞는 것도 나다.


나는 내 장애를 약점으로 유별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임용된 후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려 노력했다. 몸이 따라오지 않은 날들이 많았지만 게으름은 피우지 않았다 자부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건강이 완전히 무너져 휴식을 가져야만 했다. 장애도 그만큼 티가 많이 나게 되었다. 이제는 숨길 수가 없다. 내 코스프레로 어설프게 감출 수 있는 영역을 지나친 것이다. 빨간 후드티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빨간 후드티를 벗어서 찢은 뒤, 머리끈으로 동여매기로 했다.

이제부터는 투쟁뿐이다. 다짐한다.


내가 극복해야 할 것은 나의 장애가 아닌 사람들이라는 것을 근래 들어 더더욱 깨닫는다.


더없이 암울하고 슬픈 연말이지만 새해가 다가온다.

마음가짐을 올곧게 하고 앞을 마주하려 한다.

익명의 누군가에게 간절히 부탁해본다. 저를 응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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