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모든 것을 스러지게 한다

구병모, <파과>

by 지지

▶ 줄거리


나이 든 노인 ‘조각’은 무용이라는 유기견 한 마리를 키우며 홀로 살아가고 있다. 평범한 노부인처럼 보이는 그녀의 직업은 ‘방역업자’로, 그녀가 주로 구제하는 것은 해충이나 벌레가 아닌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어린 시절 류에게 탁월한 재능을 보여 발탁된 이래로 그 업을 내내 삼아온 그녀는 나이가 들어 은퇴를 목전에 두고 있다.


그런 그녀를 주시하는 업계의 루키 ‘투우’는 어린 시절 그녀가 방역한 아버지의 남겨진 유가족이다. 특별히 조각을 죽여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업계에 들어온 것은 아니고, 그저 흐르고 흐르다보니 업계에 들어오게 되었고 조각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 알약을 삼키지 못해 약가루를 빻아먹여야 했던 그를 살뜰히 챙겨주었던 그녀를 떠올리며, 투우는 왜 그때 나를 죽이지 않았을까? 궁금해한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그녀에게 모습을 드러내진 않는다.


한편 방역을 하던 도중 실수로 부상을 입은 조각은 늘 다니던 병원을 찾아가 원장 장 박사를 찾지만, 또 우연찮은 실수로 인해 페이닥터인 강 박사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키게 된다. 그러나 강 박사는 조각의 일에 대해 함구하겠다 약속하고, 조각은 이후로 강 박사와 조금 더 얽히게 된다.


조각을 주시하던 투우는 조각이 강박사와 그의 가족이 운영하는 과일 가게를 다니는 것을 보고 조각에게 의뢰를 넣는다. 조각이 성공적으로 의뢰를 마치려던 순간, 리어카를 끌던 노인이 폐지를 도로 쪽에 흘리고 조각이 그를 도우면서 임무는 실패하고 만다. 이를 본 투우는 화가 나 노인을 죽이고 조각은 바로 투우가 죽였음을 직감한다.


투우는 조각을 도발하기 위해 강 박사의 딸 해니를 납치하고 도전장을 조각에게 보내는데...


▶ 감상


좋았다. 오랜만에 정말 깊이 있는 소설을 읽었다고 느꼈다. 한편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어떤 길티플레저를 딱 건드린다고 느꼈다. 나의 길티플레저는 숨길 수 없이 박범신 작가의 <은교>인데, 해명을 좀 하자면 나는 <은교>를 어린 여자아이를 탐내는 늙은 노인의 더러운 야망이 아닌, 은교로 인해 어그러진 스승과 제자 사이로 읽었다. (물론 이 작품에 대한 비판도 알고 있으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히 수용하는 바이다. 때문에 내가 너무나 존경하고 사랑하게 된! 구병모 작가님에게 이런 작품을 들먹이며 감상을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감상은 일단 감상일 뿐이지 않은가.)


강 박사를 바라볼 때의 조각의 시선에서 나이 들었으나 그 안에 잠들어 있던 어떤 연심(戀心) 같은 것을 나는 느꼈다. 마찬가지로 투우가 조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그것을 느꼈다. 나는 투우가 조각을 내내 그리워하고 동경했다고 생각한다. 그것 또한 연심(戀心)의 한 종류와 비슷하다고도 생각한다. 아주 넓은 범위에서 본다면 말이다. 그는 우연히 ‘어쩌다’ 이 업계로 들어왔다고 했지만, 복수 따위는 꿈에도 꾸지 않고, 아버지를 죽인 그 여자를 찾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가 걷는 모든 길이 결국 조각을 향해 걷는 길이었다. 그의 마지막 역시도 그랬듯.


나이 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죽음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소설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할 때마다 생각이 깊어지는 것이다. 언젠가 본 글에서는 삶의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았자 삶의 이유는 죽음이기 때문에 무용하다고 했다. 그 말처럼 조각은 그저 흐르는 대로 살아왔다. 어떠한 목적과 의지 없이. 삶이 그녀를 이끄는 대로, 말하자면 삶의 이유에 충실하게 살아온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소설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은 투우의 마지막이 가장 인상 깊었지만, 두 번째로 인상 깊었던 것은 강 박사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과일가게에서 조각이 사온 복숭아가 오래 방치하는 바람에 냉장고 안에서 짓물러버린 것을 청소하는 장면이다. 조각은 매번 먹을 것을 살 때면 자신이 기르는 강아지 무용과 함께 먹을 수 있는 것을 사오는데, 복숭아는 그러지 못해 먹는 것을 잊어 그대로 짓물러버렸다. 나는 이것이 주인공 중 한 명인 투우처럼도 느껴졌다.


연식이 오래된 냉장고,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성능을 가졌지만 좋다고 말할 수 없는, 고치려고 하면 부품이 죄다 단종이 되어버려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그것이 조각 같았다. 그 안에 품고 있는 것들은 조각의 기억처럼도 느껴졌는데, 짓물러진 복숭아. 그 파과를 손에 쥐고 쓰레기통에 집어넣을 때 느낀 생경함과 시큼한 냄새가 간접적으로 투우를 가리킨다고 생각했다.


스핀오프 작품으로 <파쇄>가 있다고 들은 바, 꼭 읽어봐야겠다.


▶ 인상 깊었던 구절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조형과 부착으로 이루어진 콜라주였고 지금의 삶은 모든 어쩌다 보니의 총합과 그 변용이었다. -P.126



어떻게 한때 내 아비의 대갈통을 박살 냈던 여자가, 고작 그런 일을. 그것만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자기도 모르게 뻗은 손을 슬그머니 거둬들여 입 맞추며 그는 다만 바라보았다. 끌어당겨 손가락에 감아보고 싶었던 머리카락 대신, 거기엔 푸석하고 건조하며 구불거리는 잿빛 머리카락이 손 닿지 않는 선반 위의 해묵은 먼지처럼 뭉쳐 있었다. 그것은 기억과 호환되지 않는 현재였고 상상과 호응하지 않는 실재였으며, 영원히 괄호나 부재로 남겨두어야만 하는 감촉이었다. P.129-130



“언젠가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너는 저리로 나가야 해. 톡 대기만 해도 열리는 거 봤지? 오지 않을 주인을 기다리다 서서히 굶어 죽는 건 딱 질색이다. 돌봐줄 사람을 찾든 쓰레기통을 뒤지든, 너는 나가서 어떻게든 살아야 . 단 개장수들에게는 잡히지 말고.” P.135-6



“사람들은 자기가 가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꼭 남더러 갈 곳을 끈질기게 묻더라. 당신 지금 자기가 뭐 하고 있는지 정말 알기나 해? 아는 건 단 하나, 목적지는 몰라도 하여튼 가고 있다는 사실뿐이지.” P.220



(초략) 그녀는 앞날에 대해 어떤 기대도 소망도 없었으며 그저 살아있기 때문에, 오늘도 눈을 떴기 때문에 연장을 잡았다. 그것으로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확인하지 않았고, 자신의 행동에 논거를 깔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살아남으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일찍 죽기 위해 몸을 아무렇게나 던지지도 않았다. 오로지 맥박이 멈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움직이는 것은 훌륭하게 부속이 조합된 기계의 속성이었다. P.261-262



미안합니다. 그건 나 때문입니다. 내 눈이 당신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이 눈으로 심장을 흘리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P.277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하나의 존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혼이라는 게 빠져나갔는데도 육신이 더 무거워진다는 것은. P.291



(초략) 그녀는 류가 그립다. 그동안 특별히 그래야만 할 이유가 없어서 미뤄왔지만 이제 오늘이야말로 당신에게 가는 일을 더 이상 늦출 수는 없을 것 같다. P.304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그래서 아직은 류, 당신에게 갈 시간이 오지 않은 모양이야. P. 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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