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빛 대신 빚일지라도

김지연, <조금 망한 사랑>

by 지지

▶ 목차

포기, 『현대문학』 2022년 1월호

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 『우리는 서로를 보살피며—AnA 2』 (은행나무, 2022)

반려빚, 『문학과 사회』 2023년 여름호

긴 끝, 『릿터』 2022년 6/7월호

좋아하는 마음 없이, 문장 웹진 2024년 7월호

먼바다 쪽으로, 『창작과비평』 2023년 가을호

정확한 비밀, 『문학동네』 2024년 봄호

가능한 밝은 어둠, 『문학수첩』 2022년 상반기호

유자차를 마시고 나는 쓰네, 『겨울간식집』 (읻다,2023)


▶ 감상


소설을 읽는 동안 배경이 어렵거나 막히는 부분 없이 잘 따라가며 읽었다. 지금 나의 세대와 김지연 작가가 그려내고 있는 모습이 같은 세대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나는 김지연 작가의 <반려빚>이라는 작품을 정말 좋아하는데, 이번 소설집에 실려있어 좋았다. 권여선 작가의 《아직 멀었다는 말》에 수록된 <손톱>과 같이, 빚이 얼마나 청년의 삶에 개입하는지, 그것이 어떻게 삶을 좌지우지하는지를 그리는 모습이 특히 좋았기 때문이다. <손톱>에서는 일거수일투족을 돈 계산하는 화자가 나온다면, <반려빚>에서는 한술 더 떠서 이제 그냥 빚이 내 목줄을 쥐어버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고 웃겼던 점은 이게 또 그로테스크하거나 밉게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화자가 빚을 청산할 때는 조금 아쉬움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나 말고 물론 화자도.)


이 소설집에서 내가 가장 좋았던 단편은 <유자차를 마시고 나는 쓰네>이다. 교통사고로 인해 가족을 잃고 혼자가 된 삼촌과 조카가 함께 리조트 부지가 되어 싹 밀리게 된 유자밭에 가서 유자를 따고, 그 유자로 동네 카페에서 유자청을 담그는 내용이다. 조카인 화자는 삼촌의 아내인 숙모를 생전에 무척 싫어했었다. 아무렇지 않게 자신에게 말 걸고 오지랖을 걸고, 싫어하는 기색을 다 비치는데도 불구하고 친한 척 다가오는 점은 도무지 좋아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내심 짝사랑하고 있던 문재 오빠의 엄마였다! 갑작스럽게 사촌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남몰래 감추고 있던 연심을 접어야 했던 건 청소년이던 화자에게 꽤나 크게 다가온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밉살스럽게만 보이는 숙모가, 언젠가 하루 통화를 하는데 상대방을 자기라 부르는 것을 들은 화자는 숙모가 삼촌 몰래 바람을 피운다고 생각하여 동영상 촬영을 시작한다. 그러나 통화의 상대방은 알고 보니 숙모의 사별한 전 남편을 간병할 때에 만난 병동 사람이었다.


나는 숙모가 “자긴 어때?”라고 말했을 때부터 휴대폰을 들어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자기라니! 바람을 피우는 것일지도 모르니 증거 영상을 남겨둬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상대의 말을 한참 듣다가 크게 한 번 폭소를 터뜨린 숙모는 자기도 그 웃음소리에 놀랐다는 듯 얼른 웃음을 그치고 옅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숙모의 입에서 흘러나온 흰 입김이 공중으로 퍼져나갔다. 한숨이 계속 더해져 안개처럼 숙모의 주변을 다 둘러싸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휴대폰 화면 속 숙모와 눈앞의 숙모를 번갈아 보았다. 화면 속에서는 입김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입김이 사방으로 흩어져 더는 보이지 않게 됐을 때쯤 숙모가 말했다.

“사는 게…… 너무 달아…….”

말을 마친 숙모가 고개를 돌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슬쩍 웃고 있으면서도 어쩐지 좀 슬퍼보이는 표정이었는데 나를 발견하고는 안색을 싹 바꾸더니 환하게 웃어 보였다. (후략)


근래 들어 크레마를 사고부터는 전자책을 읽고 있어서, 저 부분이 정확히 소설집의 몇 페이지인지 표기할 수 없음이 아쉽다. 나는 이 장면이 너무 좋았다. 안개가 뿌연 아침에 달콤한 유자를 수확하자며 조카를 재촉해서 나가서는, 열심히 주인을 잃은 유자를 따던 삼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또 가시에 조심하라고 말했음에도 가시에 찔려 “유자맨”이 될까봐 걱정하는 조카의 유쾌함도 좋았다. 이 장면이 소설에서 크게 작용하는 것은, 영상을 많이 찍어둘 걸 하며 후회했던 삼촌이 조카를 통해 라이브포토의 존재를 알고 자신이 여태까지 모든 사진을 그렇게 찍은 것을 알고 앨범의 사진들을 돌려보며 웃고 우는 데에 있다 느꼈다. 1초밖에 되지 않는 그 짧은 사진 속에서 반복되는 목소리와 웃음 소리에 두 사람은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울고 웃는다. 그리고 화자는 그날 숙모를 찍은 영상이 있다는 사실을 삼촌에게 알리지 않기로 한다. 이 결정이 너무 좋았다. 내 마음에 오래오래 남을 장면인 것 같다.


이번 소설집에서 돋보였던 것은 단연 반려가 되어버린 청년의 ‘부채’와 우리가 말하는 ‘평범한 삶’의 조악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평범한 삶은 너무 아무렇지 않게 넘어지고, 사랑은 사실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부채는 그냥 현대인이라면 가지고 있는 라운드숄더나 거북목 같은 것으로 취급된다. 김지연 작가가 이런 “조금 망한” 것들을 세밀하게 잘 그려냈다고 생각한다. 조금 더 덧붙이자면 귀엽게 그려냈다. 귀엽다는 말은 좋은 말이다. 어두운 것을 마냥 어둡게 보이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무거운 주제에 무게 잡고 내핵 뚫어버리는 일도 쉽다. 하지만 무겁지 않은 것을 가볍게, 어두운 것을 밝지는 못하더라도 그럴듯한 밝기로 그려내는 것은 어려운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 인상 깊었던 구절


<유자차를 마시고 나는 쓰네>


나는 숙모의 대답을 듣고도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알게 된 사람과 계속 연락하면 죽은 전남편이 생각나서 괴로울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죽은 사람을 게속 떠올리는 건 무조건 괴롭기만 할 거라고 잘못 생각했던 탓이다.
사는 게 너무 달아서 때론 숙모와 문재 오빠에게 미안해졌다. 달고 따뜻한 걸 우리만 계속 먹는 것 같아서. 숙모를 몰래 찍은 동영상이 있다는 걸 삼촌에겐 말하지 못했다. 어쩐지 선뜻 삼촌에게 그 영상을 보여줄 수가 없었다. 사람은 지극히 행복할 때 느닷없이 슬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나도 알지만.


<포기>


(초략) 나중으로 미루는 버릇 때문에 너는 될 일도 안 되는 거야. 그렇게 말한 사람이 민재였다. 비난하는 투는 아니었다. 다만 민재는 그 버릇으로 인해 내가 앞으로 계속 평범하게 사는 것을 감당해야만 한다고 덧붙였다. 그런가. 나중으로 미루지만 않으면 특별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걸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미룬 것들은 아주 사소한 일들로, 그 일들을 일찌감치 했다고 해서 엄청난 변화가 있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감당해야 하는 쪽은 평범한 삶보다는 특별한 삶이 아닌가.

<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


상욱은 외따로 떨어진 곳에서 홀로 죽지 않기 위해 총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간다. (중략) 더 운이 좋다면 상욱은 다른 모두를 죽이고 홀로 살아남을 수도 있다. 홀로 살아남는 것. 최후의 일인이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승리다. 이 게임 안에서 다른 방식의 승리는 없다. 그래서 상욱은 어떤 식으로든 자기 홀로 살아남는 때가 오기를 바란다. (중략) 하지만 그보다는 타인이 쏜 총에 맞고 먼저 쓰러져버리는 일이, 죽어버리는 일이, 패배해버리는 일이 훨씬 더 많다. 때로는 경기 지역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서 죽어버린다. 그게 상욱을 초조하게 한다. 주식을 살 때 가장 설득력이 있었던 말이 그것이었다. 지금 들어가야 된다니까. 남들은 다 들어가 있어. 들어가야 한다, 들어가야 한다. 상욱은 살아서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전력 질주한다.

<긴 끝>


“인간들은 더 자주 서로에게 보여져야 한다고 말이야. 잘 살든 못 살든 그냥 살아 있는 게 목격이 되어야 해.”


<정확한 비밀>


“내가 죽을 뻔했거든. 차에 치여가지고. (중략) 차에 치일 뻔한 순간에 내가 바랐던 것들은 못 이루고 죽는구나 싶은 거야, 그 짧은 순간에.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내가 진짜로 바라는 건 맨날 속으로만 빌었고 막상 입 밖으로 내뱉은 말들이라곤 죽고 싶다뿐이었거든.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든 거지. 이 멍청한 신이 독심술은 할 줄 모르는 거면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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