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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지 Jan 08. 2021

얼렁뚱땅 독립출판 도전기

거! 나도 책 한 번 내보고 싶다! 이 말입니다.



  그 생각은 뜬금없이 내려왔다.

  내 의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갑자기 내리치는 번개처럼 내게 팍 꽂혀버린 거다. 나는 종종 그럴 때가 있다. 충동적인 느낌에 사로잡혀 일을 벌리고, 이리저리 밀려다니면서 일을 마무리하는 지독한... 그런 때. 왜 그 분이 오셨는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작년 11월쯤, 나는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직장을 그만둔 후에 남아버린 시간과 불어난 빚을 보며 골머리를 앓았다. 그나마 힘이 되었던 것은 인터넷으로 듣는 취미 강의, 그리고 함께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 글 모임이었다. 비록 폐쇄적이긴 하나 무언가 창작해 결과를 내는 것은 꽤 즐거웠다. 취미 강의 사이트에서는 그림 외에도 다른 여러 강의들이 있었는데, 이 중 '독립출판 클래스'가 눈에 띄었다.


  <소설 보다> 여름호에 실린 서이제 작가의 0%를 향하여를 읽고, 독립출판에 관심을 갖게 되어서일까, 독립출판 클래스가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함께 글 쓰는 글 모임 사람들과 <소설 보다> 처럼 얇고 가벼운 책을 만들어 내면 어떨까? 지난했던 2020년, 우리 열심히 썼어요! 하는 느낌으로, 마침 크리스마스까지는 100일 남은 상황이었다. 이쯤 되면 하늘의 계시였다. 그래서 대뜸 선언부터 했다.


우리 책 내요.


  당연히 지인들의 반응은 어리둥절이었다. 갑자기요? 무슨 책을요?

  나는 일단 저지르고 설명을 시작했다. 독립출판을 하자. 그간 쓴 글 모두를 모아 내기에는 분량이 힘들고, 소설 한 편씩 넣어서 가볍고 얇은 책 한 권을 만들자. 독립서점에도 입고하자! 목표는 크리스마스다.


  끼리끼리, 유유상종, 부창부수라고 하던가!


  나의 즉흥적인 제안을... 지인들은 흔쾌히 받아주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진심을 증명하기 위해 냅다 독립출판 클래스를 결제했다.


  클래스는 쉽고 재밌었다. 듣기에는 쉽고 재밌었다. 선생님이 자, 직접 해보세요. 라고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과연 그렇구나 하고 고개만 끄덕거리고 있었다. 막상 하라는 말과 함께 영상이 끝나니 허무했다. 밥 아저씨가 떠올랐다. 참 쉽죠? 아니요, 선생님. 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동영상 강의의 좋은 점은 몇 번이고 돌려볼 수 있다. 그러나, 단점은 빠른 피드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특히 짧은 영상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기란... 정말 어렵다. 나는 클래스에서 가르치는 내용 전부를 따라가진 못했다. 클래스에서 사용하는 프로그램 세 가지 중 두 개는 여전히 건드릴 줄 모르며, 하나는 그럭저럭 사용하지만 인터넷을 검색하고 유튜브를 검색해서 알아봐서 프로그램을 다룰 줄 알게 되었지, 그 클래스만으로 깨우친 것은 아니다. 이런 점은 조금 아쉽기도 하지만, 클래스를 통해 계기를 좀 더 추진시킬 수 있었고 배운게 맞았으므로 후회하지 않는다!


  우선 내 책을 하나 만들어보기로 했다. 표지는 미리캔버스라는 디자인 페이지를 이용해서 만들었다.


미리캔버스를 통해 만든 내 책의 표지


  책 사이즈를 설정하고, 책등 사이즈를 인터프로 인디고 사이트에 들어가 견적을 넣은 후 내서, 책등은 직사각형으로 만들어 가운데에 정렬시켰다. 그림은 모두 내가 직접 그린 것들이다. 표지의 그림은 트위터의 트레이싱 틀(출처:@HUGA0822)을 사용해서 그렸다. 개인소장용으로 하기 위해 그 해, 그때까지 썼던 글 모두를 정리해서 담았다.


  내지는 애플 pages 앱으로 작업한 후 pdf 파일로 내보냈다.


  표지는 린넨 커버, 내지는 단순히 글만 실었다기엔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돈 아까울 정도로 좋은 종이, 엠러프 100g를 썼고, 여기에 면지 두 장을 앞뒤로 추가해서 넣었다. 인쇄는 하... 몰라서 죄다 인디고 양면 8도...로 인쇄했다. 그렇게 완성한 책은... 내 생각보다 더 훌륭하게 "책" 같았다.


내가 처음으로 만든 내 책!


  지금 이 책은 내 품이 아닌 아버지에게 가 있다. 애초에 개인 소장으로 혼자 가지고 있으려던 책인데, 부모님이 훨씬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드렸다. 만들고 싶으면 또 만들 수도 있고, 사실 난 내 글을 잘 읽지 않는다.


  한 번 책을 만들고 나니 요령이 잡히고 재미 있었다. 내가 했던 실수들을 만회해서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함께 책을 내는 것도 몹시 기대하며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일이 계속 미뤄졌다. 결국 2021년을 기약하기로 하며 잠시 미뤄졌고, 나는 함께 책 내는 것은 비록 미뤄졌다고 하나 독립출판을 하겠다는 내 목표만은 꼭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어떤 책을 내야 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방향이 잡혔다. 손 안에 쏙 들어오는 에세이를 쓰자고.


  나는 장애인이다.


  겉으로는 티가 많이 나지 않아 "비장애인 코스프레"를 해도 자주 조용히 넘어간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에게 무례한 발언을 듣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런 일화들을 모아서 "오른쪽 다리가 불편하세요?"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내게 있었던 일들을 차분하게 문장으로 정리하며 쓰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내내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기에 이미 내 안에서 많이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미리캔버스로 다시 한 번 표지를 만들었다.

  표지에 들어가는 이미지는 모두 언스플래쉬에서 다운로드하고 누끼 따는 사이트를 통해 깨끗하게 잘랐다. 일체의 포토샵 사용 없이 만든 표지다.



  출판사의 이름을 정해야 해서 고심 끝에 내가 사랑하는 나의 강아지, 양말이의 사진과 이름을 넣었다.


  판형을 어떻게 할까 제일 많이 고민했던 것 같다. 손에 들어오는 핸디북 사이즈인 110*150으로 결정했다. 60페이지의 짧은 책이다보니 책등을 만들고 싶어 사이즈를 작게 조절한 것도 있다. 


  지난번처럼 무조건 인디고로 인쇄하는 것이 아닌, 표지는 컬러이기 때문에 인디고 양면 8도로 하되 내지는 비용 절감을 위해 미색모조 100g에 누베라 양면2도로 인쇄했다. (쉬운 말로 흑백 인쇄를 했다는 뜻이다.) 단, 표지는 단단한 느낌을 줘야 하므로 무게가 좀 있는 엠러프에 무광코팅을 하고, 아쉬운 마음에 또 면지 두 장을 앞뒤로 추가했다.


  그리고 200부 찍었다. 2020년 200부...


  초반에 책 사이즈와 여러 가지를 확인하기 위해 찍은 책이 한 권 있고, 그 뒤에 찍은 200부는 모두 다시 한 번 내 친구와 내가 수정을 거친 책이다. 폰트에서부터 참 많은 도움을 받았다. 신경 써서 나를 위해 상업적 이용이 가능한 폰트를 함께 알아봐준 친구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한다.


어마무시한 200권의 책


  입고 메일을 몇 군데 넣고 결과를 기다렸다. 다섯 군데 입고 문의를 넣었고 한 군데에서 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다이소에서 12*15 OPP봉투를 구매해 책을 포장해 책을 입고했다. 지금이야 순탄하게 적지만, 입고까지 참 지난한 과정이 많았다.


책 내지 1p와 그의 목차
직접 작성한 책 소개와 프로필



  마침내 입고된 책을 온라인 스토어에서 확인했을 때의 희열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좋은 기회를 갖게 되어 행복했고, 돈보다는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어줬으면 좋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200부를 모두 땅바닥에 뿌릴 생각은 없다.


  2021년 1월 8일, 금요일 오전 2시 47분. 현재 시각을 기준으로 책은 '5권' 팔렸다. 하하!



별책부록에 입고된 오른쪽 다리가 불편하세요? 를 구매하고 싶으신 분은 아래의 링크를 따라가시면 됩니다.


https://byeolcheck.kr/product/untitled-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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