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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레인 Aug 27. 2021

바늘이 된 그녀와의 만남, 김수자의 바늘 여인

세상과 세상을 이어주는 그녀의 바느질

Kimsooja A needle woman 2009, video still, Art Gallery of New South Wales © Kimsooja


호주 뉴사우스웨일즈 아트 갤러리(Gallery of New South Wales)에서 김수자 작가님의 비디오 작품인 '바늘 여인'을 보았을 때, 그때의 그 감동을 잊지 못하겠다. 같은 한국 여성 작가의 작품을 시드니 최고 갤러리에서 볼 수 있다는 게 감격스러웠었고.. 자랑스러웠었다. '바늘 여인'은 서로 다른 문화가 교차하고 반응하는 현재 시대를 아주 잘 나타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바늘 여인' 비디오 작품 속에서 김수자 작가는 관객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화면 중앙에 가만히 뒤돌아서 서있는다. 긴 흑발을 포니테일로 깔끔하게 묶은 그녀. 그녀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떠올랐는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도시 한복판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는 그녀를 지나친다. 때로는 그들의 몸이 서로 부딪치기도 한다.



이 작품을 갤러리에서 처음 보았을 때, 한참을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들여다가 보았었다.

낯선 도시에서 까만색 긴 머리를 다정하게 묶고 돌아서 있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나 같아서 말이다.

글 쓰는 이 순간,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피부색도 다르고, 언어도, 국적도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꿋꿋하게 저 자리를 서있는 그녀의 모습이 정말 나 같아서 오늘 더 와닿는다.


그녀는 낯선 문화와 나라에 던져진 아웃사이더다. 이 작품 속에서 김수자 작가는 '바늘 여인'이 되어 사람과 공간을 잇는 바늘이 된다. 낯선 나라의 도심에 있는 사람들은 바쁘게 그녀를 지나쳐갔지만 그녀는 바늘이 되어 그들을 꿰뚫는다.


이 작품에서 바늘은 김수자 작가 본인으로 표현되며, 그녀의 몸은 이 작품을 지켜보는 관객의 성찰의 재료로 사용된다. 그녀는 작품을 통해 사람들과 세상을 엮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늘 여인'이라는 제목이 무색하게 이 작품에 정작 '바늘'은 나오지 않는다. 김수자 작가는 그녀의 작품에서 자신을 바늘로, 세상을 천으로 표현한다. 그녀에게 바느질은 숨을 쉬고 세상과 소통하는 행위이다. 어쩌면 이것은 상처를 치유하는 치료적 행위일 수도 있다.


필자는 사극이나 드라마를 보면 서방님의 옷에 학과 용으로 수를 놓아주는 여인들이 그렇게나 신기했었다. 이토록 바느질은 꽉 막힌 시대 속에서 여성이 창조적 욕구를 발산해 온 예술 형식이다. 바느질은 여성의 삶에 녹아있는 자기표현의 행위이며, 오랜 시간 동안 여성의 문화에 자연스럽게 뿌리를 둔 삶과 예술이었다.


필자는 바느질을 할 때, 바늘에 찔려서 유독 피를 많이 보았다. 바늘은 이렇게 상처를 주는 도구이지만 치유의 도구이기도 하다. 이 작품 속에서 김수자 작가의 몸은 파편화된 세계를 치유하는 바늘과 실에 비유되며 인간의 관심과 무관심, 자유와 간섭을 나타낸다. 즉, 이 작품 속에서 바느질은 일상의 의미를 넘어서서 인간과의 관계와 소통의 문제로 확장된다.


바늘로 바느질을  , 바늘자신의 역할이 끝난 후에 사라지고 실의 흔적만 남는다.


이러한 작품의 특징은 김수자 작가의 여성으로서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바느질을 하는 남자, 아직도 필자는 솔직히 좀 어색하다. 그만큼 필자가 자라온 문화에서는 바느질은 엄연히 '여성의 일'이었다. 김수자 작가 역시 어머니와 함께 했던 바느질의 기억을 통해 이렇게 작품을 만든다. 그녀는 바늘이 됨으로써 여성의 일과 예술, 철학을 하나로 묶었다. 이 작품 속에서는 김수자 작가는 여성 노동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있으며 그 의미를 높이고 확장하고 있다. 그리고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었다. 여성의 일인 바느질이 이렇게 철학적인 작품이 되다니.. 이게 진짜 예술이지.


김수자 작가의 작업은 여성의 전통적 행위인 바느질을 예술적이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확장시키고 재현함으로써 세계와 주변을 작가 자신이 '바늘'이 됨으로써 서로 잇고, 포용하는 예술로 승화하였다. 세상과 세상을 이어주는 그녀의 바느질은 내게 무척이나 인상적이었고, 또 충격이었다.


원래 김수자 작가님에 대해서 대학원 과제로 엄청 길게 썼었는데.. 굳이 페미니즘 개념과 노마디즘에 대해서 이곳에 쓰고 싶지 않다. 솔직히 나도 무슨 말인지 모름. 잊고 싶다... 머리 아프다. 그거 한국어로 쓰면.. 오늘     같다.


이런 분이 한국 분이셔서.. 한국의 여성 작가 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김수자 작가님의  다른 작품인 보따리 트럭에 관해서는 언젠가.. 필자가 쓰고 싶을 ,  써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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