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용과 오마주, 그리고 창작의 게으름 사이에서
0. 우선 이 글은 특정 아티스트, 팬덤을 비방하려는 의도는 일절 없음을 밝힌다.
1. 제로베이스원의 신곡 콘셉트가 일본의 인기 만화 슬램덩크의 모티브 차용를 차용했다는 점에서, 일부에서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제목부터 시작해서 익숙한 장면, 명확한 시각적 상징, 친숙한 감정선까지 그대로 재현된 이번 사례는 단지 오마주, 패러디, 차용이라는 말로 넘어가기에는 말로 넘어가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을 남긴다.
2. 사실 콘텐츠의 오마주, 패러디, 차용을 둘러싼 논란은 콘텐츠 산업 전반에서 장르를 막론하고 꾸준히 반복되는 이슈다. 특히 크리에이티브에 민감한 오타쿠 씬에서는 잊을만 하면 정기적으로 떠오르는 단골 주제이기도 하다.
K-POP씬에서도 타 장르의 모티브 차용으로 논란이 되거나, 심한 경우는 콘셉트 자체가 폐기되는 등, 유사한 사례가 몇 차례나 있었다.
3. 물론 오마주, 패러디 등은 창작에서 자주 쓰이는 방식이다.
특히 광고, 브랜디드 콘텐츠, 뮤직비디오, 그 외 영상물 등 특정 작품의 감성이나 구조를 차용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온도는 ‘창작하는 사람의 고민이 얼마나 담겨있는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4. 우선 창작의 관점에서 짚어보자.
오리지널 콘텐츠를 그대로 다른 언어로 옮긴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전략은 재해석이라기보다, 최소한의 시각적 레퍼런스를 차용한 뻔한 모사에 머무른다. 즉, 껍데기 뿐인 차용에 가깝다.
원작에 대한 존중이나 창작자의 고민을 거친 실험적 시도 없이 단순한 재현한 방식은 팬이나 소비자에게 ‘진정성 결여’라는 인상을 줄 수 있으며, 때때로 브랜드의 신뢰도를 깎아내리기도 한다.
5. 팬들의 입장에서도 단순한 모티브 차용은 불쾌함만 남긴다.
원작 팬의 입장에서는, 등장인물의 서사나 감정의 깊이는 배제한 채 비주얼 요소만 따온 얄팍한 차용이 마치 코스프레이자 마케팅 도구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인기 있는 IP에 무임승차당했다는 인상은, 자신이 소중하게 지켜온 세계관이 상업적으로 가볍게 소비된다는 사실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반면, 모티브를 따온 쪽의 팬들도 그 의도 전달이나 해석의 여지가 부족한 점에 실망을 느낄 뿐 아니라, 불필요한 논란으로 인한 피로감과 억울함까지 떠안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6. 오타쿠는 콘텐츠의 여백을 자신의 뇌에서 보충하고 재생산하는 것이 특기인 종족이다.
(또한 이러한 문화적 풍토가 콘텐츠의 발전을 이끌어왔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아이돌의 콘텐츠는 단지 노래나 춤을 넘어, 하나의 이야기로 소비된다. 팬들은 그 서사의 진정성을 보고 응원하고, 가끔은 감정적으로 동참한다.
그렇기에 어떤 콘텐츠가 ‘왜 이렇게까지 똑같이 했을까?’라는 질문을 불러온다면, 기획자와 창작자의 게으름과 의존성을 드러낸 결과로 보여질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고민이 담긴 결과물을 빌려쓴다면, 단순 복붙은 지양하고, 원작의 고민에 대한 존중과 자기다움을 확보하는게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까.
7. ‘누구나 아는 감정’을 그대로 가져오는 건 쉽다.
하지만 그 감정을 지금 다시 꺼내는 이유를 만들어내는 것은, 여전히 기획과 창작을 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왜 지금 그 대상인가? 어떤 의도로 그 대상을 다시 조명하는가? 어떤 시선으로, 어떻게 그 감정을 담아낼 것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명확한 답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