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
언제부터였을까. 골목길을 걷는 즐거움을 발견한 때가.
조금 엉뚱한 답일지 모르지만, 내가 떠올린 답은 '군복'이다. 논산훈련소에서 조교로 복무하던 당시 기초 군사 훈련을 마치면 한 번씩 짧은 휴가가 주어졌다. 처음이야 친구들도 만나고 하고 싶은 것들을 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점점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혼자 노는 것 만큼 익숙지 않았던 것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다 하루는, 휴가라는 사실을 부모님께만 말씀드리고 조용히 나와 아침 일찍 서울로 향하는 1호선 열차에 올라탔다. 스마트폰이 없었던 시절이기에 노선도를 펼쳐 나름 진지하게 목적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쉽게 끝날 줄 알았던 고민은 점점 길어졌고, 성균관대역에서 탑승한 1호선은 어느새 노량진역을 지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청량리역까지 흘러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2호선과 만나는 시청역에서 내렸고, 그렇게 나는 '혼자 놀기'를 반강제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함께 걸으면 연인과 헤어진단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덕수궁 돌담길을 혼자라는 생각에 신나게 걸었고,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을 지나 지금은 사라진 정동극장(정동극장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금요일과 토요일 밤에 시작해 다음날 새벽까지 최신 영화 3편을 연달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잊지 못할 것이다)까지 발걸음이 닿았다. 그리고는 서울역사박물관, 경희궁을 거쳐 경복궁역으로 향했다.
그렇게 처음 만난 곳이 '서촌'이었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구나, 라는 생각을 갖게 해 준 곳(나중에 이 생각은 부암동을 알게 되면서 바뀌었지만). 경복궁을 기준으로 서쪽에 형성된 그 곳, 서촌.
여러모로 마음에 드는 곳이었지만(2008년의 서촌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좋은 의미에서 말이다) 통의동, 적선동, 효자동, 창성동, 옥인동, 통인동, 체부동, 누하동, 궁정동 등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닌 동네들이 작은 골목길들로 이어져있다는 점에서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뜬금없는 고백이지만, 솔직히 말하면 요즘 길을 걸을 때 가장 많이 보는 것은 오른손에 들린 스마트폰이다.
(이 녀석은 도통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하지만 그 때는 달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마트폰을 손에 든 채 혼자 놀기를 시작하지 않은 것은 정말 큰 축복이 아니었을까 싶다. 골목길을 걸으며, 이 길이 일반적인 길은 아니구나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으니 말이다.
길을 걸으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창문'이었다. 이방인에게 자신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전해주는 매개체이자, 공간 스스로 숨을 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창문. 더 재미있는 것은 안에서 보는 풍경과, 밖에서 보는 풍경이 다르다는 점이다. 이방인으로서 안을 바라보는 모습, 안주인으로서 밖을 바라보는 모습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기도 한다. 물론, 서촌의 골목길에서 나는 안쪽을 훔쳐보느라 바빴지만 말이다.
골목길을 걷다가, 문득 내가 걸었던 골목길을 안쪽에서 바라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한 나름의 좋은 방법은 골목길 옆 카페에 들어가는 것이었고, 그렇게 나는 아주 잠깐 동안 안주인이 될 수 있었다. 화장실이기에 더더욱 그랬겠지만, 창문은 모두 열려있지 않았으며 안에서의 느낌과 밖에서의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그리고, 그 모습이 우리의 마음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모두 다 보여줄 수 없고,
모두 다 들여보내 줄 수 없는
우리의 마음과 꼭 닮은 창
의자도 그랬고, 창(窓)도 그랬다. 한 번 관심을 갖게 되니, 계속해서 눈에 들어왔다.
2014년에는 다른 해보다 더 많은 곳을 여행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아프지만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이야기들이 곳곳에 묻어있는 군산이었다. 자동차보다는 버스를, 버스보다는 기차를, 기차보다는 걷는 것을 좋아하는 내게 걸어서 대부분의 모습들을 볼 수 있는 군산은 최고의 여행지였기 때문이다.
첫 째날, 철길마을을 시작으로 초원사진관을 지나 근대역사박물관으로 가는 길이었다. 2차선 도로였지만 골목길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길을 친구와 걷고 있었는데, 한쪽으로 폐허가 된 건물의 창문과 마주하게 되었다. 점심이 갓 지난 시간이었지만, 안쪽의 시계는 여섯 시 이십오분에서 멈춰버렸고, 깨진 유리를 통해서는 반대편의 오래된 건물이 보였다.
각기 다른 시간 속에 머무르는 이들
서로의 모습을 비춰주고, 기억해주기도 한다는 것
첫 번째 혼자 놀기, 그리고 처음으로 가본 서촌과 서촌의 골목길.
보물이라는 것이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기에 많이 다르겠지만, 내게는 '창문'이었고 그 뒤로 의자와 더불어 길을 걷다 또는 어느 공간에 머무를 때 가장 관심있게 지켜보는 대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