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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열두시 Dec 07. 2015

언제부터 였을까 '메모'

메모,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

아버지의 메모


감사한 일이다. 여행의 즐거움을 아버지로부터 배웠으니 말이다. 또 한 번의 여행을 앞둔 어느 날, 거실 탁자에 놓인 아버지의 메모를 보게 되었다. 빼곡하게 쓰인 여행 일정은 누가 봐도 쉽게 이해하고 알아볼 수 있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여행의 설렘이 반감될 수 있다며 일정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던 아버지였고, 뒷좌석에 앉아 동생과 이정표를 보며 이번엔 어디로 가는 걸까 추측하는 즐거움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내게 그 메모는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여행지에서 마주한, 아버지의 뒷모습. 2014년 가을 화천






아들의 메모


혹여나 문이 닫혀, 배고픔이 길어지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점심 먹을 장소를 두 개씩 적어놓은 아버지의 메모를 보며 당신의 메모가 늘 우리를 향해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 역시 메모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우선 생각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옮겨 적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일기 같기도 하고, 또 다르게 보면 반성문 같기도 했던 메모들은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2014년 겨울의 어느 날, 합정에서의 미팅을 끝마친 후 시간이 남아 자주 들르는 카페로 향했다. 전날에는 겨울비가 많이 내렸었고 그날은 바람이 강하게 불었는데, 하늘만큼은 어느 때보다 맑았기에 유난히 시리게 느껴진 날이었다. 내가 서있는 곳도, 내가 바라보는 하늘만큼 맑고 따뜻해졌으면 좋겠다 생각했고, 커피를 주문하자마자 펜을 꺼내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가끔은, 스스로가 아닌 누군가에게 전하는 내용으로 남겨두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겨울비에 젖고 시린 바람에 흩어진 아픔을 쓸어 담았어요
그리고 아직 마르지 않은 아픔들을 따로 골랐지요
그 무게가 너무 커 한꺼번에 들어 올릴 수 없었기에 하나씩 하나씩 올려놨어요

파랗게 물들어 가는 하늘과 맞닿으면 아픔을 덜 수 있지 않을까
따뜻한 빛을 마주하면 아픔이 아물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러니 아프지 않았으면, 아니 조금씩 아물었으면









어릴 적, '우체통은 왜 모두  빨간색야?'라는 질문 아닌 질문을 자주 했었다고 한다. 오래되지 않아 그 이유를 알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와 다른 색으로 만들어진 우체통과 우편함을 보면 반가움 마음이 앞선다. 보내고, 받는 마음이 조금은 더 온전하게 전달될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빈도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홀로 여행을 떠나거나, 지금과 같은 연말이 다가오면 으레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편지와 엽서를 쓰고 있다. 그럴 때면 누군가에게 어떤 마음을 담아 쓰느냐에 따라 펜을 맞잡은 나의 손놀림이 달라지는데, 가장 행복할 때는 멈출 수 없는 춤을 추듯 써내려 가는 그 순간들이다. 올해엔, 여름 여행의 첫 방문지였던 여수에서 15년을 함께한 친구에게 쓰는 편지가 그랬다.  





마음을 담아 손글씨를 쓸 때면 
서로의 손을 맞잡은 펜과 우리의 손은 춤을 추기 시작한다
스텝이 꼬이는 일도 없으며 추고 추어도 지치지 않는다

나는 네게 그런 사람이고 싶다 
너를 생각할 때면 그렇게 마음을 담아 글을 쓸 때면
언제고 멈출 수 없는 춤을 출 수 있는





한 번씩은 이렇듯, 스스로 자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남겨두는 것이 큰 울림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막힘없이 써내려 갔다'가 아닌, '멈출 수 없는 춤을 추었지'라고.









지금은 베트남에 있기에,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는 소중한 사람이 있다. 고등학교 같은 반, 좋아하는 음악과 축구 이야기를 하며 가까워진 녀석. 그와 떠난 작년 가을의 군산 여행은 브런치에 글을 쓰며 몇 번을 언급했을 만큼 내게 값진 시간이었는데, 서로의 이야기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나눠가질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철길마을에서 마주친 벽화를 보며, 가을에 불러들인 봄과 함께 시들지 않는 꽃에 대해 이야기한 순간이 기억에 남는다.

 




시들지 않는 꽃은 없겠지만
시들지 않는 사람은 있다고 말해주고 싶은 날






텍스트 보다는 이미지가, 단편적인 이미지 보다는 흐름이 있는 영상이 우리의 기억을 더 깊게 되살려 준다고 하지만, 함께 보고 나눈 이야기를 압축해 글로 남겨놓은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순간이었다. 시들지 않는 꽃이라 써놓은 메모를 보며 군산을 떠올리고, 시들지 않는 사람이라 써놓은 글을 보며 그 녀석을 떠올리다 보면 자연스레 더 많은 것을 이어 붙일 수 있으니.










요즘 부쩍 많아진 생각 중 하나는
누군가가 나를 들여다봤을 때 이렇게 꽃이 가득한 모습이면 좋겠다는 것
그렇게 향도 느끼고, 다음에 피어날 꽃을 빗대어 그려 볼 수 있다면!

지금 내리는 비가 그 꽃을 자라나게 하는 빗물이었으면 좋겠다





비가 오는 날이었고, 좋아하는 커피를 마음껏 마실 수 있었던 날이었다. 카페 내부의 벽에는 낯선 작가의 작품들이 드문드문 걸려있었고, 빛에 반사된 일부가 스마트폰 액정에 담겨있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꽃이 들어와 있는 모습에 나는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질문을 나는 아직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페이지에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가끔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을 받아 적는 것도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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