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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열두시 Dec 13. 2015

언제부터 였을까 '술'

술,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

지금도, 가장 많이 하게 되는 소박한 다짐


스무 살이 되기 전 술을 처음 접했었다. 호기심으로 시작되었던 한 잔의 술은 지독하리만큼 썼고, 그 날 나는 10년이 넘도록 지키지 못할. 아니 앞으로도 지킬 수 없을, 스스로와의 약속을 하고 말았다.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어!




2015년 11월, 서울에서 마신 가게맥주




하지만 스무 살 신입생이 되어 더 자유롭게 접하고 마실 수 있는 때가 되자 스무 살을 기다린 이유가 마치 '술'이었던 것처럼 거의 매일을 함께 하게 되었고, 지난날의 약속은 '오늘은 조금만 마시자'라는 소박한(?) 다짐으로 바뀌게 되었다.




사랑 애(愛) 미움 증(憎) 애증, 그 아슬아슬한 균형점


당연하지 않은 이야기, 두 번째 중,

이유도 모른 채, 취하기 위해 술을 마시던 때가 있었다. 상대방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기보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내뱉는데 열중했었고, 다음날에는 전날의 기억을 찾아 헤매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기도 했다.
지난날의 술잔은 비워지는 걸 용납하지 않았고 그만큼 빠르게 채워졌는데, 다행히 이제는 빈 잔으로 머무르는 시간을 늘려가며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배워가고 있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먹을거리'와 '마실거리'를 접해왔지만 술을 마시는 순간만큼 변덕이 심해지는 때도 없는 것 같다. 잘 마시던, 그렇지 않던 좋을 때는 한없이 좋지만, 싫을 때는 또 한없이 미워지기도 하는 애증의 대상 술. 그럼에도 내가 10년 전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는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이제야 술 한 잔에 담긴 의미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먼저 배운 것은, 빈 잔에 채워지는 것은 술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 잔, 두 잔 술이 비워지는 그 잔들을 우리의 이야기가 대신하기도 한다는 것. 그 이야기는 스스로 삼키기 위한 쓰라림이자 마음일 수도 있고, 함께 나누어 덜어내고자 하는 의지일 수도 있다.




2015년 가을, 서울 종로의 어느 가게맥주집




한 잔, 두 잔, 세 잔
예전에는 잔이 비워질수록 조용해졌는데
이제는 잔이 비워질수록 소란스러워진다.

그만큼 묻어둔 이야기도, 지나온 이야기도
많아졌다는 뜻이겠지






대화, 아니 용기가 필요한 순간


조교로 복무하며 가장 신경 썼던 일 중 하나는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훈련병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었다. 밖에서 보면 아무 일도 아닌 것들이 훈련병이라는 신분이 되는 순간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일과 시간이 끝나면 나는 한 명씩 차례로 불러 어려운 점은 없는지, 지금 가장 걱정되는 것이 무엇인지,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어떻게 생활할 것인지 등을 묻고 듣는 일을 반복했다.


아마, 그때부터 나는 '듣는 일'에 익숙해졌던 것 같다. 그 뒤로도 친구들과 지인들은 내게 각자의 이야기를 잘 털어놓았고, 무언가 덧붙이지 않더라도 '듣는 것' 그 자체로 충분히 고맙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고 공감해줄 수 있다는 것에 좋았지만, 듣는 역할에 충실하다 보니 정작 내 이야기를 털어놓지 못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 함께 전이되는 감정들이 상대를 힘들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더욱.




2015년 봄, 낮술로 와인을 선택했던 날



그래서 한 번씩, 술을 통해 나의 이야기를 시작할 '용기'를 얻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 번씩 술은, 무언가 시작할 좋은 변명을 만들어주기도 하니 말이다.





용기가 없어서일까 아니면 시간이 필요해서일까
첫 잔에 하지 않았던, 두 잔에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흘러나오는 시간

세 잔, 네 잔 그렇게 비워지는 잔 대신
서로의 이야기가 채워지는 시간





2014년 겨울, 술이 아니었다면 보지 못했을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여전히 술은 내게 애증의 대상이다. 그만 마주하고 싶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가장 먼저 떠올리는 대상.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알면알수록 더 큰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처음엔 아무 감흥이 없던 이 불빛이 식당을 나오면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으로 보였던 것처럼. 이 날은, 술이 참 고마웠던 날이었다.




그래도, 알면알수록 즐거워도.
술에 취해 스스로를 잃고,
잊는 것은 피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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