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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열두시 Mar 31. 2016

그때, 그 찰나의 순간 '뜻밖의 존재'

우리를 웃음 짓게 만드는 뜻밖의 만남들



연극계에는 반짝이는 재능을 가진 젊은이가 정말 많지만,
63세의 인물을 연기할 여배우는 부족해요.
그래서 제가 쓸모가 있었던 거지요. 뜻밖의 존재라고나 할까요.



작년 말, 우연히 읽게 된 '뜻밖의 스파이 폴리팩스 부인'의 한 장면이다.

그녀의 존재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다르기에, 뜻밖으로 다가온다.

할머니 스.파.이.라니!





 2016년 봄, 집 근처 상가건물의 지하주차장 입구





어릴 적, 어머니의 손을 잡고 1호선 빨간 열차를 기다릴 때면 눈을 꼭 감은채 바라던 것이 있었다. 창이 넓은 출입문의 열차였으면- 하는 것. 그래야 어른이 된 듯, 까치발을 빌려서라도 창밖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누가 안아주지 않아도, 혼자서 휙- 휙-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것들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시간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전철 안에서 한 번씩 어린아이들을 만나야만 볼 수 있는 그때의 모습이 그리워진 어느 날, 많이 풀린 날씨에 역에서 집까지 짧지 않은 거리를 걷게 되었다. 한참을 걷다 마주친 상가건물의 지하주차장 입구에는 내 키보다 낮은 사다리가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까치발을 딛고 창 밖을 바라보던 그 아이의 눈높이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 아이였다면 사다리를 올라야, 앞을 가로막고 있는 벽을 넘어 무언가 바라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사다리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여 보았더니
걸어온 길 대신, 회색의 시멘트만이 눈 앞에 보였다
그렇게 나는 아주 오래 전의 나를 만날 수 있었다
뜻밖의 존재를 통해서 말이다





2016년 봄, 양재시민의숲 근처의 회사 건물






3월 초, 서비스 기획자로서의 세 번째 스타트업으로 이직을 하게 되었다. 면접날에는 지정된 자리에 모든 차들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었는데, 첫날 조금 일찍 나와보니 자리에 하나씩 무언가 놓여있었다. 차례로 지나쳐 문으로 들어서려던 찰나, 그 무언가가 미소 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곧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인지, 어제저녁 이후에 만나지 못했던 누군가를 보게 된다는 설렘 때문인지, 아니면 유난히 맑고 파랗던 하늘을 마주 보고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분명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내려다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이유야 어떻든, 그 자리에 놓인 뜻밖의 존재로 인해
출근 첫날, 입구서부터 포근해졌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2016년 겨울, 사당역 인근의 어느 건물






어릴 적, 케이블카에서 가장 신났던 이유는 가만히 앉아서 좌우를 넓게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눈 앞에 펼쳐진 풍경들 덕분이었겠지만, 차에서도, 전철에서도, 기차에서도 그만큼 넓게 바라볼 수 없었기에 더 즐거웠던 것 같다. 올 초, 조금은 이른 시간에 동기들을 만나 술을 마시게 되었다. 술을 마시는 그 자리를 좋아할 뿐, 많이 마시지 못하는 나는 얼마 뒤 바람을 쐬러 복도로 나왔다. 정면에는 고층 오피스텔이, 아래쪽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대로가 있는 도심 속의 평범한 풍경이었다. 그새를 참지 못하고 걸려온 전화에 몸을 돌리는 순간, 바깥쪽으로 열린 창문으로 멀리 노을지는 모습이 비쳤다.





어느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비슷한 모습으로 가득찬 도심속에서,
실루엣만으로 마주한 노을은 황홀함 그 자체였다






폴리팩스 부인이 젊고 섹시한 스파이였다면 보통 이상의 구성이 아니고서야 눈에 띄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60대로 접어든 부인이자 스파이였던 그녀 덕분에 나는 사다리를 통해 오래 전의 나를 만날 수 있었고, 주차장 주인의 미소를 통해 포근함을 느낄 수 있었으며, 도심 속 창문을 통해 노을을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오늘은 또 어떤 뜻밖의 존재를 만나 웃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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