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열두시 Jul 29. 2015

언제부터 였을까 '열차'

열차,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

가장 오래전, 시작된 이야기


1호선 군포역을 지날 때면, 어머니께서 늘 하시는 말씀이 있다. 어릴 적 경기도 군포에 살았을 때 어머니와 내가 가장 많이 갔던 곳은 동네 놀이터도, 어머니 친구분들 옆자리도 아니었단다. '한 대만, 아이 한 대만 더 보자 응?' 기차가 지나갈 때면 '너무 빨라서 제대로 보지 못했단 말야'라면서 한 대를 더, 지금도 종종 보이는 그래서 더 반가운 빨간색 전철이 지나가면 '이번엔 빠르게 지나가는 기차가 보고 싶단 말야'라면서 또 한 대를. 그렇게 나는 어머니와 오랜 시간 역 근처에 머물렀다고 한다.



후다다다닥
우와아아아



외할머니댁 거실에서 밥을 먹고, 만화를 보다가 한 번씩 이모의 화실이 있는 2층으로 뛰어 올라갔던 이야기는 외할머니의 단골 소재이다. 2층에서는 의정부역에서 출발해 신탄진역까지 향하는 단선 열차가 드문드문 보였고, 그 열차를 보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뛰어 올라갔던 것이다. 사실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열차가 지나갈 때마다 친절하게 알려주는 것도 아닌데, 외할머니께서는 내가 그 어떤 알람보다 정확하게 뛰어 올라갔다며 웃으신다. 군포역에서도 그랬고, 외할머니댁에서도 그랬다. 속도가 빠르고 느리고, 몇 칸이 함께 움직이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내 눈앞을 스쳐지나 가는 그 순간들이 내게는 마냥 신기했던 모양이다.




2015년 초여름, 대전역 경부선 플랫폼에서 바라본 충북선 무궁화호 열차



'싣다'


그 때만큼 오랜 시간을 머무르지도 않고, 그 때보다 빠르게 달려가는 것도 아니지만 여전히 나는 열차가 좋고 수많은 열차들이 오가는 역이 좋다. 얼마 전, 대전역에서 광명으로 향하는 KTX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반대편 플랫폼으로 제천까지 달리는 무궁화호가 들어왔고, 사람들이 하나, 둘 올라타기 시작했다. 열차에 달린 몇 개의 계단을 넘어 번호가 맞는지 확인하고, 좌석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아직은 긴장한 모습의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는 사람들. 그 때부터 나는 작은 창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차례대로 보기 시작했다. 여행을 떠나는지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나와 같이 열차와 역을 좋아하는지 밖의 풍경들을 바삐 담는 사람,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소식을 전하는 사람 등. 같은 칸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 모습은 조금씩 달랐다.



창문 덕분이었다

첫 번째, 두 번째 그리고 마지막 창문까지 차례로 훑으며
무궁화호에 올라탄 수 많은 사람들은 물론
그들을 따라 나선 여러 감정들을 엿볼 수 있었다   



열차는 좌석 하나에 한 명의 사람뿐만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올라탄 여러 감정들을 싣고 출발했다.

하나의 열차에 실린 수 많은 사람들과 감정들이라니. 이보다 더 매력적인 옴니버스가 또 있을까 싶었다.


 



2015년 겨울, 1호선 관악역 플랫폼




'마중'


아차 싶었다. 1호선 관악역의 출구는 서울 방면을 기준으로 가장 뒤에, 수원 방면을 기준으로 제일 앞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전철의 맨 뒷칸에 올라탔어야 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는 앞서 달리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맨 뒤에서 홀로 걷고 있었다. 함께 내린 사람들이 한 명씩 출구로 모습을 감췄고, 그제야 시선이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 누군가 마중을 나와있었다는 사실 역시, 그 때야 눈치챌 수 있었다.




누군가 마중을 나와있었다
  
역의 모든 그림자들은 나를 향해 있었고
그 모습은 누군가 먼저 손을 내밀어 주는 느낌과 같았다
순간의 실수를 저지른, 낯선 이를 향한 반가운 마중


  

2014년 겨울, 2호선 성수역 계단



'곱씹기'


가위, 바위, 보! 아싸! 나는 보로 이겼으니깐 다섯 칸이다!

어릴 적, 친구들과 걸으며 가장 반가웠던 것은 계단이었다.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칸씩 올라가기도 하고 칸씩, 다섯 칸씩 올라가기도 했던 그 놀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역전되었지만, 에스컬레이터보다 계단을 더 먼저 찾았던 유일한 때이기도 했다. 그런 계단이. 이제는 많은 추억을 곱씹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가위 바위 보 대신 한 걸음에 한 칸씩 추억을 되살리는 장소가 된 것이다. 내게는 2호선 성수역이 그랬다.(지금은 아니지만)



첫 번째 계단을 밟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의식

계단의 수 만큼 많은 조각들을 불러오는
이 과정의 하이라이트는 모든 계단을 내려와 뒤를 돌아보는 그 순간이다

조금 더  그리워하고 싶은 것들과
그 곳에 남겨두고 싶은 것들이
선명하게 나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순도 높은 그리움만이 곁에 남게 된다.




2012년 겨울, 여수엑스포역



'시작과 끝'


얼마 전,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던 내일로를 다시 한 번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창업을 시작하기 전인 2012년 1월, 나와 동기들이 선택한 나름의 의식은 내일로였고 수원역에서 출발한 새마을호가 도착한 곳은 여수엑스포역 이었다. 첫 도착지였고, 바다가 코앞에 있다는 사실에 정신이 팔려 그 순간에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다음 날 순천으로 가기 위해 다시 도착한 여수엑스포역에서 어제는 알지 못했던 사실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끝에서 뒤돌아서면 시작이 되고
도착이 때로는 출발을 낳는다는 사실을
시작과 끝은 아주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머뭇거리지만 않는다면
언제든 다시 출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2015년, 어느 기차역에서




이직으로 인해, 상암으로 출근하며 매일 탔던 1호선과 2호선을 평일에는 거의 탈 수 없게 되었다. 출근을 위해 전철을 기다리는 시간이 마냥 즐거웠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즐거울 수 있었던 이유에 역이 있었고, 열차가 있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이번 주말이면 나는 또, 버스 대신 전철이나 기차를 보고 올라타기 위해 역으로 향할 것이다.




https://instagram.com/zagmaster/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