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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열두시 Apr 18. 2016

그때, 그 찰나의 순간 '잔상'

하나씩, 천천히 쌓인 기억들이 불러낸 잔상들








모든 건 끝이 있어
그래서 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거야









두 번째 편(비포 선셋)을 조금 더 좋아하지만, 얼마 전 비포 시리즈의 첫 번째 편인 '비포 선라이즈'를 다시 볼 수 있었다. 올 초, 이터널 선샤인에 이어 그토록 바라던 재개봉이 비포 선라이즈에까지 이어진 덕분이다.


낯선 만남의 순간으로 시작해 서로에게 잊지 못할 시간들로 채워지는 영화는, 마지막에 각자의 방향으로 향하는 기차와 버스에 몸을 실은 채 창 밖을 바라보는 주인공들을 아무 말 없이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이 창 밖을 바라보며 떠올리는 잔상들을 하나씩, 천천히 보여준다. '그들'이 함께 했었기에 '우리'의 시간으로 기억할 수 있는 장면들을 말이다. 그렇게 주인공들은 지난 만남을 되돌리며 행복했던 시간들이 다음으로 이어지기를, 일회성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란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간 뒤에도 남겨진 잔상들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 뒤의 이야기를 알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영화를 통해 남겨진 잔상들이 꼭 그들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만에 찾아간 부암동에서 잔상들이 오랜 시간 이어졌던 진짜 이유를 만날 수 있었다.




2012년 봄과 여름의 사이, 부암동의 어느 카페




주어진 시간의 '끝'이 아니라,
만들어진 관계의 '끝'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보낸 시간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들이 방금 전까지의, 함께 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다음을 기다리는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보며 섣불리 관계의 단절까지는 닿지 못한 채, 다음 만남을 그려보기도 하고 지난 시간들을 다시금 떠올려 볼 뿐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 지난날의 여러 '우리'는 영화 속 남주인공이 정의한 최악의 이별인 '추억할 만한 게 전혀 없어서'가 아니라, 언제 들이닥치고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의 시간들로 둘러 쌓여 있기에 더 아련한 잔상들을 불러오는 것이었다.




2016년 봄, 부암동의 어느 골목길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달라졌을까, 피어오르는 잔상들이




내게 잔상들은 '장소'를 매개로 많이 피어오르며 같은 목적으로, 자주 들렀던 곳이라면 더 오랜 시간을 머무르다 떠나간다. 처음엔 기억을 기억으로 덮어 씌우면 되는 줄 알았고,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는 줄 알았는데 하나의 시간, 목적, 사람으로 각각 나뉘어 쌓이다 보니 어떤 때는 그곳에 쌓여 있는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같은 상황에서 하나씩 몰려오기도 한다. 분명한 점은 끝까지 남아 있는 잔상은 언제나, 마지막 즈음의 기억들이라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우리'의 시간이었기에 더더욱.




2015년 봄 벚꽃이 필 무렵, 부암동의 어느 카페




비슷한 주제로 십년지기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궁금했다. 나와 다른 성의 그녀는 어떤 잔상들을 보고 있을까, 마지막에 남는 잔상은 무엇일까 말이다. 그녀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는데, 좋은 기억들만 자꾸 떠올린다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좋은 기억이 더 많았음에도 좋지 않은 기억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며, 그게 두려워 좋아하는 거리를 걷지 못하고 좋아하는 장소에 다시 가지 못하는건 억울하다고 말이다. 사실, 나 역시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몇 번을 시도해도 계속 주저하는 스스로를 발견 할 때가 많았다.




'우리'가 만들어낸 기억들과
그 속에서 '내'가 만들어낸 기억들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처럼, 다음 만남을 기약한 상태로 각자의 길을 떠났다면

영화를 보는 것처럼, 그들에게서 조금 벗어나 그들의 잔상을 바라보는 상황이라면

이렇듯 기억으로부터 출발하는 잔상들을 오래 떠올리고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 '우리'로 시작된 기억들과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잔상들은 결국 돌아갈 수 없는 순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기에 더 오랜 시간을 머무르다 떠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지금의 나와 그 때의 우리를 연결해주는 유일한 통로이며, 그 때의 내가 담아둔 우리를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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