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열두시 Jun 16. 2016

언제부터 였을까 '세탁소'

나의 비밀을 가장 많이 담고 있는 장소

그날의 세탁소


정말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토요일 밤에 TV를 보게 된 것은. 

서로의 시간을 평일보다 더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는 토요일은 보통 점심부터 저녁까지 밖에서 보내는 경우가 많았고, 다시 보기에 익숙해진 요즘 정해진 시간에 TV를 보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앞서 마지막으로 본, 그래서 내게는 첫 번째 채널이 된 TV에서는 30년 동안 한 곳에서 세탁소를 운영해오신 아저씨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2016년 봄, 익선동의 어느 세탁소






30년 동안 한 곳에서, 자신만의 일을 해오셨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길게는 10년 동안 짧게는 처음으로 세탁소를 찾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그 사람들을 대하는 아저씨의 태도와 반응 역시 마찬가지. 아저씨가 VJ의 질문에 대답을 하던 중에 한 소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늘은 혼자 왔네?'라는 인사에, 소녀는 카메라가 낯설었는지 네, 라는 답을 짧게 하고는 들고 온 옷을 수줍게 내려놓았다. 옷에는 작은 얼룩들이 묻어 있었고, 이리저리 살펴본 아저씨는 '중요한 옷이구나?'라는 말을 이어하셨다. 


그제야 그녀는, 어머니께 선물 받은 옷인데 입고 나가기 직전에 실수로 커피를 쏟았다는, 혼자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시무룩한 표정으로 세탁소를 찾은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걱정 말라며, 어머니한테 선물 받은 그대로 돌려주겠다는 말을 전했고, 소녀는 안심이 된다는 듯 웃으며 세탁소를 나갔다. 그 뒤로도 많은 사람들이 왜 세탁소를 찾게 되었는지, 저마다의 사연과 작은 비밀들을 옷과 함께 맡기고는 그곳을 떠났다. 






엄마한테는 비밀로 해주세요!라는
그녀의 말이 비밀을 하나 털어놓고
후련하다는 듯 집으로 향하는 친구의 뒷모습처럼 보였다 
그렇게 아저씨는 옷과 함께 작은 비밀들을 맡고 있었다





2015년 겨울, 익선동의 어느 카페






그날의 비밀


소녀의 모습을 보며, 옷과 함께 맡겼던 나의 비밀들은 무엇이었는지 떠올려 보았다.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2013년 여름으로, NHN UXDP 프로그램의 마지막 날 입었던 셔츠였다. 10박 11일 동안 진행된 프로그램의 마지막 발표를, 팀장이었던 내가 맡게 되었고 자신 있게 무대에 올랐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출발하기 전, 정성껏 다림질을 해 가방 가장 안쪽에 넣어두었던 셔츠. 하지만 발표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아무렇게나 구겨 넣어진 신세가 되어 버렸다.


다시 보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를 것 같아 숨기듯 옷장 깊숙이 넣어둔 셔츠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계절이 바뀌며 옷장을 정리하면서였다. 중요한 날에만 골라 입었던, 그렇게 의미 있는 결과로 이어지게 도와주었던 셔츠에는 2013년 여름의 기억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버릴까, 라는 생각도 했지만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오랜만에, 아주 평범한 날에 셔츠를 입어보았다. 그러자 안쪽부터 차례로 쌓여 있었던 이야기들이 조금씩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것 같다
지우고 싶지만 쉽게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있다면
한 번쯤은 잠시 내어두고, 맡겨도 되지 않을까

우리가 옷을 맡기는 이유는
새 옷처럼 다시 입기 위해서이지
버리기 위한 것이 아닌 것처럼






그날, 나는 오랜만에 세탁소엘 들렀다. 한 손에는 셔츠를, 한 손에는 2013년의 비밀을 담아서 말이다. 






2015년 겨울, 문래동의 어느 골목길






그날의 시작


옷이 처음부터 지우고 싶은 흔적과 비밀들을 떠올리게 하는 연결고리는 아니었다. 밤늦게 퇴근하는 일이 잦았던 홍보대행사 인턴 시절, 조금 더 늦게 일어나기 위해 옷을 미리 골라 놓으면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다음날의 일정에 따라 옷을 정해야 했기에, 그날의 흔적들은 대부분 옷으로 시작해 옷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지우고 싶은 자국들이 쌓이면 세탁소를 떠올렸고 이제 그곳은 나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곳이 되었다.






스마트폰을 통해 밤늦게라도
세탁물을 맡길 수 있는 환경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옷을 들고 세탁소로 향하는 이유는
나의 비밀이 중간에 새어나가지 않길
바라는 마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2016년 겨울, 합정의 어느 카페






시간이 흘러 지금의 세탁소를 더 이상 찾지 못하게 된다면,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로 가보고 싶다. 굳이 하나씩 찾아보지 않더라도, 잘 정돈되지 않은 채 흩어져 있더라도, 흐른 시간만큼 무뎌진 흔적들을 확인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당신의 세탁소엔
어떤 비밀이 담겨 있나요


매거진의 이전글 언제부터 였을까 '의자' 마지막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