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열두시 Aug 07. 2016

그때, 그 찰나의 순간 '배려'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그래서 잊지 못할 배려들






성규야 이거 
내가 지금 이거밖에 없어
미안해





2011년 9월, 그날의 옥상






다음날로 예정된 미디어 행사를 앞두고, 우린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만 했다. 하나, 둘 새벽이 되어서야 집으로 향했고 나는 아침 일찍 회사로 돌아와 챙겨야 할 물품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었다. 준비를 다 끝내고 옥상에 올라 담배 한 개비를 태우고는 자리로 돌아와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충전기를 넣으려는 순간 검은색 토트백 안에 들어있는 현금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다 어느 순간 떨어진 줄 알았지만, 함께 놓여있던 메시지를 보고 나서야 누군가 나를 위해 넣어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성규야 내가 지금 그거밖에 없어 미안해' 


자신은 아직 정리해야 할 일이 남았다며 먼저 들어가라고 말해준 사람. 나야 고작 하루, 이틀이었지만 며칠 동안 밤늦게까지 일을 했으니, 나보다 더 피곤할 사람.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여전히 회의실에 앉아 노트북을 붙잡고 있었던 사람. 나의 사수였다. 


새벽 세 시, 수원까지 가야 하는 내가 조금 더 편하게 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그마저도 많지 않은 금액이라고 생각해 미안함을 함께 담은 마음. 그렇게 내 가방에는 단순히 택시값을 지불하기 위한 현금이 아니라 사수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현금과 함께 있던 노란색 포스트잇은 인턴 생활 내내 활용했던 노트의 첫 장에 붙여놓고 매일 아침 봤을 만큼 내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마음이었다.






사소함의 기준과 배려의 정의는 모두 다르겠지만,
예상치 못한 순간 우리를 파고드는 배려는
스쳐 지나가지 않고 오랜 시간 머문다
그 날, 나의 사수이자 선배의 마음처럼






2015년 봄, 삼청동의 어느 카페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많은 비가 내리던 아침이었다. 회사에서의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 나는 평소와 달리 자유롭지 못한(?) 옷을 입고 있었기에, 버스에서 내려 비를 맞지 않고 전철역으로 들어갈 방법을 고민해야만 했다. 버스에서 내려 바로 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50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시장과의 중간 지점에 정류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철을 타실분들은
지금 내리지 말고
잠시만 기다리세요!






버스가 시장을 거쳐 오지 않았기에 안쪽까지 들어갈 수 없었던 기사님은 기존의 정류장에서 시장 방향으로 가야 하는 사람들을 먼저 내려주었고, 동시에 전철역으로 향하는 사람들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하셨다. 그리고는 조금 더 앞으로 이동해 역 내부로 연결되는 입구 바로 앞에 우리를 내려주셨다. 덕분에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앞선 고민들 대신, 얇게 맺힌 빗방울들을 털어내며 기분 좋게 전철에 오를 수 있었다. 






나비의 직업이 꽃과 꽃 사이의
거리를 재는 일이라고 했던
안도현 시인의 말이 생각나는 아침이었다

그날, 기사님은 우리를 위한 거리를 재어
있는 그대로 전해주셨으니 말이다






2016년 여름, 양재시민의숲 근처의 어느 카페






얼마 전, 갑작스러운 복통에 나는 응급실을 가게 되었다. 퇴근과 맞물린 시간이었고, 참고 견디기엔 아픔이 점점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CT와 X-ray 촬영 후,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나는 응급실 한편의 침대에 누워 홀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처음 경험하는 낯선 공기에 나아질 생각이 없는 복통이 더해져 괴로운 시간이 이어졌다. 고통을 참고자 꽉 깨문 입술에 피가 고이고 식은땀으로 온몸이 젖기 시작할 무렵, 배를 움켜잡고 있었던 손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많이 아프죠?
검사 결과 곧 나올 테니
조금만 더 참아요






침대 끄트머리에 있는 담요를 덮어준 뒤 한 손으로는 내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링거를 확인하며 말을 건네준 사람. 응급실에 있었던 간호사였다. 응급환자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기에 오랜 시간 곁에 머물러 주지 못했지만 그녀 덕분에 나는 숨통이 트였다. 처음 들어왔을 때 맞았던 진통제 보다, 그녀의 마음이 담긴 찰나의 온기가 내게는 더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2011년 가을, 인턴 생활을 했던 회사 근처의 골목길






서울 답지 않게 골목길이 많았던 그곳에서 한 번씩 산책을 할 때면, 셔터에 칠해진 알록달록한 색을 보고 무지개 같다는 말을 해주던 사수. 늘, 함께 일하는 나를 먼저 생각해주고 배려해주었던 사람.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았던 배려를 떠올릴 때면 5년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가장 먼저 닿게 되는 기억이다. 그리고 우리를 위한 거리를 재어, 힘든 출근길을 가볍게 만들어준 기사님, 찰나의 온기를 통해 진통제 보다 내게 더 큰 힘을 전해준 간호사까지. 이 좋은 마음들을 하나씩 담아, 모아 두었다가 지금보다 더 삭막한 시간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다시 하나씩 꺼내보고 싶다. 






그렇게 마음을 받았었지 -
라는 생각에서 머물지 않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쉽게 떠나지 않고 오랜시간 머물 수 있는
마음을 한 번씩 전해야지 -
라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때, 그 찰나의 순간 '이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