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의 끝에 선택한 '창업'
누군가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처음'에 대해 물어보면 스물 다섯살의 창업이 먼저 떠오른다. 창업 전 나는 홍보 대행사에서 6개월 동안 인턴 생활을 했다. 이때 나는 선배들을 도와 마케팅홍보 전략을 만들고 온, 오프라인 행사를 기획하며 클라이언트와 관련된 뉴스 기사, SNS 콘텐츠를 정리하고 분석하는 일을 했다. 일은 재미있었고, 좋은 팀원들 덕분에 배울 것도 많았지만 거의 매일 이어지는 야근은 생각보다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점심시간까지 쪼개어 회의를 하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사무실에 머물며 인스턴트 음식 섭취는 많아지고 반대로 움직임은 줄어드니 잦은 위염에 시달렸다. 지금도 편의점 도시락을 잘 못 먹는 건 그때의 기억 때문이다.
대행사 특성상 업무 방법을 쉽게 바꿀 순 없으니 조금 더 건강한 음식이나 간식 섭취가 가능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새벽 배송이나 구매처가 다양하지 않은 상황에서 나는 기존 패턴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서비스를 직접 만들어 운영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6개월의 인턴 생활 막바지,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정규직으로 전환 후 일을 계속하는 것, 학교로 돌아가 창업을 준비하는 것이었고 나는 지금이 아니면 다시금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아 후자를 선택했다.
짧지만 6개월 간 나름 치열한 인턴 생활을 했고, 많은 것을 배웠기에 초반 창업 준비는 그리 낯설지 않았다. ‘집단지성을 활용한 아이디어 구체화 플랫폼’을 아이템으로 선정하고, 공동 창업자로 학교 동기를 영입해 사업계획서 등 필요한 자료들을 하나씩 준비했다. 기획안이라면 학교에서도 대행사에서도 쉼 없이 작성했기에 그저 즐거웠고, 운 좋게 수원시에서 제공하는 창업지원센터에도 입주할 수 있었다. 아직 우리의 아이템을 문서화 한 정도였지만 우린 다음과 또 다음을 생각하며 희망을 키워나갔다.
그렇게 몇 개월의 준비 끝에 2013년 여름, 경기도에서 진행한 G창업 경진대회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고 심사위원들 앞에서 자신 있게 사업 아이템을 설명했다. 초기 투자는 물론 사무실 입주까지 이어질 수 있는 기회였기에 기대는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기대가 무너지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준비한 창업 아이템이 지나치게 이상적이며 실현 가능성이 적다는 피드백으로 결선 진출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친구들은 공채를 위해 영어 공부며, 면접 준비를 하는 그 시간에 나는 단 둘이 아직 언제 구현될지 모르는 종이 몇 장의 창업 아이템을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현실이 무서웠다. "형, 피봇팅 하자."라는 말을 건네며, 처음이 처음으로 아득하게 다가왔다.
다시 한번, 그러나 빠르게
“3개월 간 준비했는데, 아직 프로토타입도 없어요?”라고 묻던 심사위원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고, 동시에 시간 관리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서 작성에는 자신 있었던 우리 상황이 되려 부정적인 상황으로 연결되었단 생각에 피봇팅 한 아이템은 빠르게 테스트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고, 홍보대행사 시절 겪었던 불편함을 해결할 수 있는 ‘건강한 간식과 차'를 정기 구독할 수 있는 아이템을 살려보기로 했다. 개발은 외주로, 디자이너와 마케터 등은 커뮤니티 공고를 통해 합류했다.
그런데 기획, 디자인, 외주 개발은 모두 변수의 연속이었고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 연달아 들이닥쳤다. 나름의 면접을 통해 채용한 디자이너가 전화 한 통으로 일을 그만두기도 하고 외주로 개발한 웹 서비스는 버그가 없는 화면을 찾는 게 더 쉬웠다. 출근과 동시에 작성한 오늘의 해야 할 일이 점심시간 전 2배로 늘어나는 상황도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기존에 계획했던 일정은 변수를 점점 통제하기 어려워졌고, 업무 효율성은 낮아졌다. 나는 물론 팀원들도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갈 수밖에 없었다. 한 잔의 술에, 버겁다는 말을 몇 번 내뱉어야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정말 아찔한 상황이었다. 그게 창업이고, 그건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흔히 겪을 수 있는 일이자 상황이라는 걸 깨닫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대로는 우리가 아닌 변수가 시간과 일정을 통제할 수도 있겠다, 잡아먹힐 수도 있겠다 라는 위기감이 몰려왔다. 하루는 퇴근과 동시에 구글에 한글과 영어로 시간 관리와 일정 관리에 대한 무수히 많은 글을 검색했고, 다음엔 어떻게 해야겠다는 내용들을 닥치는 대로 적었다. 또 지금까지도 내게 유일한, 홍보대행사에서 업무의 기본을 내게 알려준 사수에게도 조언을 구했다.
효율적인 시간 관리를 위한 노력
그렇게 알게 된 몇 가지 방법을 업무에 적용해보기로 했다. 나중에서야 이 방법이 ‘Time Block’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나와 팀원들이 사용한 방식은 꽤 단순했다. 먼저 우리가 언제까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능한 모든 것을 적었다. 해야 할 일을 단계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우선 되어야 정해진 일정을 지킬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고 구성원들 간 업무 배분도 효율적으로 진행될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정해진 일 사이에 끼어드는 변수들도 조금 여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겠단 생각도 있었다.
매일 퇴근 전 10분 정도 모여 내일의 할 일을 공용 화이트보드에 적는다. (당시엔 지금처럼 Miro, Beecanvas 등의 툴이 활성화되지 않았기에) 중요한 것은 할 일만 적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상황을 고려해 시간을 할당하는 것이었다. 서비스 제안서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한다! 와 같이 작성하는 것이다. 단순히 할 일을 적어 놓는 것으로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계속 경험했기에 우리에겐 이 과정이 매우 중요했다. 그렇게 출근 - 퇴근 시간에 맞춰 각자의 할 일을 한눈에 볼 수 있게 정리해 작성한 뒤 퇴근을 했다.
출근과 동시에 퇴근 전 작성한, 첫 번째 칸에 입력된 업무를 시작한다. 우리가 적은 그대로 일을 할 수 있다면 더없이 즐겁겠지만 때로는 전화 한 통, 이메일 하나에 그 시간이 간섭받기도 한다. 간섭은 곧 우리 시간과 업무를 방해한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다음과 같은 기준을 함께 설정했다.
업무와 업무, 즉 시간과 시간 사이에 10-15분 정도의 여유 주기
정해진 업무와 시간에 다른 업무가 끼어들어야 하는 경우 우선순위를 위한 기준 만들기
끼어든 업무가 먼저라면, 해당 업무를 진행한 시간만큼 기존 업무를 재구성 하기
필요하다면 나머지 업무 일정도 다시 한번 확인, 다음날 일정까지 함께 고려하기
가장 중요한 건, ‘기준'이라고 생각했다. 끼어든 시점이 오늘의 업무를 작성한 시점 이후라 심리적으로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기준은 상황에 따라, 팀 구성에 등 여러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핵심은 어제 작성한 오늘의 업무가 먼저일까? 아니면 오늘 급한 척 끼어든 업무가 먼저일까? 를 구분하는 것이다. 작성한 업무를 하던 중 새로운 업무를 진행해야 할 상황이 생긴다면 우리가 함께 논의하며 작성한 기준을 잠시 살펴보고 결정하는 습관이 생기게끔 함께 노력했다. 먼저 해야겠다! 가 앞서면 기존 업무 일정을 수정하고, 조금 나중에 해도 되겠다! 가 먼저면 오늘 남은 일정 중 하나를 수정해 넣든지 퇴근 시간에 작성할 내일의 업무에 포함할지 정했다.
그리고 함께 병행한 것은 쉬는 시간을 언제 갖느냐는 기준이었다. 대학교까지 우리에게 익숙한 방법은 수업이 하나 끝나면 일정 시간을 쉬고 다시 정해진 시간만큼의 수업을 듣는 것이다. 업무도 보통 이와 같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은데, 문제는 다시 일을 할 때 몰입하기까지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업무 시간을 할당할 때, 다음 업무로의 진입까지를 반드시 고려했다. A라는 업무를 끝내고, B라는 업무를 조금 한 뒤 쉬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A 업무에 할당되는 시간을 계산, B 업무를 마지막 10분 정도 포함시킨다.
정해진 만큼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다.
B 업무를 다시 이어서 진행한다. 다음 쉬는 시간 전, C 업무를 일부 진행한다.
이 과정을 반복한다.
업무에 구체적인 시간을 할당하고, 다음 업무를 일부 시작한 뒤 쉬는 시간을 갖는 것. 지금 보면 꽤 단순해 보이지만 우리에게 주는 효율성은 꽤 컸다. 한 달 정도 진행 후 회고 시 정확한 측정은 어렵다면서도 집중력이 올라갔고 전반적인 업무 관리와 파악이 상대적으로 쉬워졌다는 의견이 많았다.
물론, 업무가 실제 성과로 이어지는 건 다른 얘기지만 나는 창업 때 팀원들과 활용한 방법으로 내가 먼저 해야 할 일, 잠시 미뤄도 되는 일 등을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또 업무 간 비슷한 수준의 집중과 몰입을 유지하며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었다. 뒤의 내용에서 다시 ‘실패'에 대한 내용을 다룰 테고, 나의 창업은 1년 도 채 되지 않아 마무리되었지만 이때 배운 시간 관리 방법은 지금도 수없이 많은 변수가 존재하는 스타트업 속 기획자로서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2023년 07월, 제 첫 도서가 출간되었어요. 제목은 ’10년 차 IT 기획자의 노트’입니다. 브런치 '기획자가 일하는 방법'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사수 없이 일하는 어려움을 저보다 조금 늦게 출발한 분들이 덜 느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었는데요. 같은 맥락에서, 9개 노트(기록)를 바탕으로 기획과 PM의 주요 업무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정리한 내용입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어요!
2023년 07월, 제 첫 도서가 출간되었어요. 제목은 ’10년 차 IT 기획자의 노트’입니다. 브런치 '기획자가 일하는 방법'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사수 없이 일하는 어려움을 저보다 조금 늦게 출발한 분들이 덜 느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었는데요. 같은 맥락에서, 9개 노트(기록)를 바탕으로 기획과 PM의 주요 업무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정리한 내용입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