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스타트업
1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이어진 나의 첫 번째 스타트업은 절반의 성공으로 끝이 났다. 비록 투자 유치와 그 이상의 성과에 다다르진 못했지만,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사용자들에게 전할 제품을 개선하는 과정에서의 속도감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다. 또 동료들과 함께 우리가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을지, 더 나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때론 치열하게, 한편으론 신나게 논의하며 혼자가 아니라 우리로 일하는 맛을 알 수 있었다.
군 생활과 창업 등으로 3년 이상 휴학을 한 상태였기에 나는 마지막 학기 및 다음 단계를 준비하기 위해 학교로 돌아갔다. 그렇게 바로 취업 준비를 시작했고, 공채에 필요한 스펙을 쌓기 위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창업을 했던 경험은 계속 나를 따라다녔다. 이력서에 추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같은 환경과 상황에서의 경험을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티드, 로켓펀치, 리멤버 커리어 등 채용 서비스가 다채롭게 존재하던 때도, 잡플래닛, 블라인드처럼 기업 내부 소식을 알 수 있는 서비스가 존재하던 때도 아니었기에 나는 잡코리아 등에서 서비스기획이란 직무로 등록된 스타트업 채용 정보를 틈틈히 확인했다. 그러던 중 ‘위자드웍스'에서 작성한 공고를 보게 되었고 나는 당시 평소 자주 쓰던 ‘솜노트' 서비스를 직접 담당하고 싶은 마음에 상암에 위치한 사무실로 면접을 보러 갔다.
지금은 달라졌을 수 있지만, 확실히 대기업 공채 면접과 다른 분위기에서 ‘창업'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동안, 즐겁게 나눌 수 있었다. 면접의 끝에 나는 솜노트로 작성한 실패노트 일부를 보여줬고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언제 어디서든 쉽게 작성하고 간직할 수 있는 즐거움을 더 많은 사용자들과 나누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일주일 뒤, 지금은 내 결혼식 사회를 봐줄 정도로 가까워진 동생에게 연락이 왔고 덕분에 나는 2014년 한 여름, 창업 이후 또 한 번의 스타트업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의 연속
위자드웍스 입사 후, 나는 솜노트 등 기존 프로덕트 대신 신규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됐다. 그와 동시에 조금 다른 상황을 접하게 되었는데, 기획과 마케팅, 운영은 우리가 하지만 개발은 다른 곳과 협업으로 진행하는 것이었다. 처음엔 창업을 하며 외주 개발사와 협업한 경험을 바탕으로 업무를 진행했지만, 대금을 지불하고 개발을 하는 것과 초기부터 같은 목표를 바라보고 업무를 하는 것은 많은 차이가 존재했다. 무엇보다 서로 다른 공간에 머물고 있고, 일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점은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프로젝트 관리 및 기획 역할을 담당하는 내게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했다. 이대로는 프로젝트가 제대로 시작되긴 커녕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먼저, 창업을 하며 어느정도 고정된 나의 업무 방식을 작성했다. 이를 바탕으로 위자드웍스에서 한 달 정도 경험한 내용과 2주 간 함께 협업한 개발팀의 업무 방식을 적었다. 이 세 가지 내용을 3열로 작성해서 충돌이 발생할 것 같은, 프로젝트 진행에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내용에 빨간색 펜으로 표시했다. 마지막으로 빨간색으로 표시된 내용들을 노트 옆 장에 옮겨 적었다. 그리고 개발사 대표님에게 연락을 해 업무 방식과 앞으로의 진행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자고 제안했다. 앞서 정리한 내용을 문서 형태로 전달 할 수도 있었지만, 업무 방식에는 정답 보다 각 팀별로 최적화 된 경우가 많기에 의사 결정은 어떻게 되는지, 팀원들이 성향이나 기존 프로덕트 개발 과정 등은 어땠는지 직접 들으며 우리의 접점과 균형을 찾아 적용하기로 했다.
함께 일할 구성원들과 1:1 인터뷰 진행
빨간색으로 표기된 내용을 먼저 확인하고, 추가로 우려되거나 개선 되었으면 하는 방법들을 다른색 펜으로 추가했다. 생각보다 많은 내용들이 작성된 것을 보며 우린 이 만남이 꽤 의미있다는 생각을 했고, 대표님은 이런 자리를 마련해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다른 팀원들도 한 번 만나보라고 했다. 함께 하는 프로젝트(또는 프로덕트)를 위한 원칙과 기준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다른 세 명의 팀원과 차례대로 1:1 인터뷰 일정을 잡고 조금 더 세부적으로 내용을 준비했다.
인터뷰 목적 설정
함께 하나의 프로젝트를 만들어 가기 위한 기준 설정
인터뷰 대상에 대한 정리
업무 성향, 담당 프로덕트 등
인터뷰를 위한 사전 자료 공유
빨간펜으로 작성한 내용과 대표님 미팅을 통해 정리한 내용
인터뷰 진행에 필요한 문서 제작
인터뷰 진행 시 주고 받은 내용을 바로 작성할 수 있는 문서
한 곳에서 2년 이상 업무를 진행한 세 명이었기에 인터뷰 전에는 비슷한 내용들이 나올거라 예상했지만 실제 진행해보니 더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마지막 인터뷰를 끝낸 뒤 작성한 문서를 보며 정리를 위한 기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내용 찾기
개별적이어도 답변에 오랜시간 할애 된 내용 찾기
업무 외적인 내용들은 과감하게 제외하기
위 기준에 따라 통합본 작성하기
참여자 모두와 리뷰 후 피드백 반영하기
가이드 문서 작성 후 업무에 활용하기
팀원들과 인터뷰를 통해 반복적으로 언급된 건, 기획자 없이 일하던 상황에 대한 우려와 기대였다. 그래서 나는 통합본에 프로젝트 진행 과정 속 기획업무는 무엇이고 각 단계 별 필요한 이유와 산출물이 무엇인지 함께 작성해 공유했다. 이렇게 완성된 문서는 팀원들과 다같이 확인하며 수정과정을 거쳤고 총 2주 간에 걸쳐 우리가 앞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필요한 기준으로 삼을 수 있었다.
조금씩 쌓이는 신뢰, 하지만 지금부터가 진짜!
앞선 경험은 내게 조직개편 등으로 팀 환경이 바뀌거나, 새로운 프로젝트 진행 초기 등 특정 상황에서 팀원들의 혼란을 줄이고 PM을 중심으로 끈끈하게 뭉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줬다. 또 팀 단위로 논의 할 때 들을 수 없었던 개개인의 업무 과정에 따른 고민을 듣고, 정리하며 우선순위에 따라 반영하는 방법도 알 수 있었다. 물론 프로젝트 진행 과정에서 생기는 이슈들은 또 다른 방법으로 정리하고 다뤄야하지만 출발 단계에서 팀원들 간 신뢰도를 높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는 점에서 소중한 시간이었다.
스타트업도 투자 단계 등에 따라 조직 규모는 달라질 수 밖에 없지만 위자드웍스에서의 경험처럼 초기 프로덕트 구축에는 많은 인원이 투입될 수 없는 환경이 많다. 이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일정도, 우리가 만드려는 프로덕트도 아닌 사람이다. 규모가 작을수록 한 명, 한 명이 끼치는 영향은 클 수 밖에 없고, 이는 곧 모든 단계와 과정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PM으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 있다면, 이처럼 함께 프로덕트를 구축하고 그 과정을 함께 해나갈 팀빌딩이라고 생각하며 그 출발점은 서로를 잘 아는 것 그리고 서로가 공감할 수 있는 기준과 바탕을 만드는 것이다.
또 하나,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네? 라는 공감대를 형성한 이후 과정도 늘 신경써야 한다. 신뢰를 쌓는 것도 어렵지만 쌓인 신뢰가 무너졌을 때 다시 회복하는 건 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하나씩 알게 되고 실제 반영, 더 끈끈해지는 과정을 경험한다는 건 개인적으로 스타트업에서 일하며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그 팀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좋은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23년 07월, 제 첫 도서가 출간되었어요. 제목은 ’10년 차 IT 기획자의 노트’입니다. 브런치 '기획자가 일하는 방법'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사수 없이 일하는 어려움을 저보다 조금 늦게 출발한 분들이 덜 느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었는데요. 같은 맥락에서, 9개 노트(기록)를 바탕으로 기획과 PM의 주요 업무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정리한 내용입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