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사진,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진을 찍은 후에는 폴더를 태그처럼 활용하여 일주일에 한 번씩 정리를 해두는데 그 날은 '하늘'사진들을 옮기고 있었다. 그렇게 한 장씩, 그리고 여러 장씩 모아서 보다 보니 지난날 봤던 한 다큐가 생각났다. 초등학생으로 이뤄진 그룹과 성인들로 이뤄진 그룹에게 각각 하늘을 자유롭게 표현해보라고 했는데 결과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성인들은 90% 이상이 파란색 계열로 하늘을 표현한 반면에 아이들은 어느 하나 같은 색으로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15년 봄 부산 / 15년 여름 순천만정원 / 15년 여름 1호선 의왕역 / 14년 가을 군산
그리고 다시 한 번 사진들을 봤는데, 이렇게 다양했구나 싶었다. 한편으로는 한 때, 마케터로서의 삶을 준비하며 블로그를 통해 줄기차게 외쳤던 '어린아이와 같은 상상력'을 결국 나는 잊고 지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나 다양한 색으로 이뤄져 있는데,
쉽게 잊고 쉽게 알아채지 못했던 이유는
고정관념이라는 울타리 속에 갇혀
성급하게 색을 채워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뒤로, 성급하게 색을 채우지 않겠다는 다짐 아닌 다짐을 하게 되었고 그 출발과 시작으로 '흑백'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난 사진들을 흑백으로 만든 뒤 나는 어릴 적 즐겨했던 색칠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진을 촬영하던 당시의 잔상이 계속 남아있어 쉽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대상을 더 풍요롭게 바라볼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로마의 휴일, 레베카 그리고 최근의 아티스트와 프란시스 하,이다까지 흑백영화를 보며 주인공이 입고 있던 옷은 무슨 색일지, 함께 머무는 장소는 어떤 모습일지를 상상해본 경험이 있다면, 흑백사진에 새로운 색을 입히는 과정도 그리 어렵지 않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성급하게 채워진 색을
다시 한 번 곱씹다 보면
'하늘색'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단순하고 일반화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직접 촬영한 것이든, 누군가 공유한 것이든 흑백이 감싸고 있는 사진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깊은 사색에 잠길 때가 많다. 만약 그 대상을 실제로 본 적이 있다면 그 깊이는 절정에 달한다.
위의 사진은 원래 흑백으로 촬영된 것이 아니다. 당시 카메라를 들고 가지 않았기에 아쉬운 대로 손에 들린 스마트폰으로 촬영을 한 후, 흑백으로 변환한 것이다. 기존 사진에서는 얼어붙은 강물에서 시작해 멀리 보이는 산의 모습까지 들어왔지만, 이 사진에서는 나무와 우측에 서있는 사람의 모습만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둘의 관계가 내게는 촛불 하나를 밝혀두고 어떤 바람을 독백으로 읇조리는 것처럼 보였다.
위의 사진은 바로 어제인 수요일 퇴근 전 건물 1층에서 찍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흑백으로 촬영된 것은 아니며 기존의 색을 뺀 모습이다. 해질 무렵이었기에 밀물처럼 들어와 스며들었던 빛들이 다시 빠져나가던 순간이었고, 그 찰나를 담고 싶었다. 원래 사진에서는 빛의 잔상들로 인해 대상에 집중하기 힘들었지만, 이렇게 보니 처음과 달리 서로 흩어져 있던 빛들이 되돌아가기 위해 날개를 펼친 것처럼 느껴졌다.
금호미술관 1층과 2층과 사이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밝은 벽면으로 인해 그 범위를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흑백을 통해 이렇듯 명확하게 영역을 알 수 있었다.
흑백이라는 시작점을 통해
기존의 정해진 것이 아닌 자신만의 것(色)을 입혀보고
그렇게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의미를 찾아(索)가는 것
많이 부족하지만, 조금 더 자유롭게 흑백에서의 시작이 가능하다면 나의 기억들에게도 다시 색을 입혀주고 싶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서로 다른 색으로 칠해 좋았던 것들만 더 편하게 꺼내볼 수 있도록 말이다.
오늘 하루는 흑백으로 시작해 색을 채워보는 것,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