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넘기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다
책은 가로 넘김입니다. 2000여 년 전 로마 시대, 한 장 한 장 모아 묶은 형태로 만들어진 때부터, 기본적인 구조는 크게 달라진 점이 없죠. 한때 두루마리 형태도 썼지만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습니다. 책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쓰였는데 앞으로 갑자기 사라지겠냐고. 이렇게 오래 버텨온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겠냐고.
세로 넘김 책은 그래서 새롭게 보입니다. 사실 기자 수첩이나 노트, 일력 형식 달력에서 가끔 쓰이고 있는 형식이긴 합니다. 공간이 부족하거나 참고 자료를 함께 봐야 할 경우, 벽에 걸어두고 쓸 경우 유용한 형태죠. 그런데 이번에, 그렇게 세로로 넘기는 책이 나왔습니다. 뉴욕타임스 기사(링크)에서 소개했네요.
알고 보면 세로 넘김 책은 새로 등장한 스타일은 아닙니다. 네덜란드의 종 블로에드사가 특허권을 가지고 있는 방식으로, 지난 10여 년간 네덜란드에선 성경을 포함해 꽤 많은 책이 이런 형식으로 제작되어 팔렸다고 합니다.
드워슬리거(Dwarsligger)라 불리는 이 제책 방식은, 한 손이나 양손을 이용해 책을 위로 넘기는 것이 특징입니다. 글씨도 당연히 가로 읽기에 맞춰서 인쇄되어 있죠. 종이는 일력처럼 얇아서 넘기기 쉬우며, 책 자체도 작고 가볍습니다. 한 손으로도 읽기 쉽게 쫙- 펴지고, 저절로 닫히지 않는다고 하네요.
미국에선 네덜란드 작가의 책을 수입하던 회사가 이 형식을 발견했습니다. 도서 구입을 자극할 새로운 판형에 목말라 있던 출판사는, 시험 삼아 세로 넘김 책을 네덜란드에 주문해 내기로 합니다. 출판을 맡은 곳은 랜덤하우스 산하 부티크 출판사 듀톤입니다. 출판되는 책은 인기 작가 존 그린의 대표작 4종으로,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내 이름을 말해줘', '알래스카를 찾아서', '종이 도시'입니다. 권당 12달러에 세트는 48달러.
출판 판형을 바꿔서 독서 수요를 자극하는 방법의 역사는 오래됐습니다. 문고본을 비롯해 최근 자주 볼 수 있는 미니북이나, 군인용 문고본(한국에선 진중 문고?) 등 같은 콘텐츠를 판형을 바꿔 새로 내는 식이죠. 이번 세로 넘김 책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세로 넘김이란 방식이 스마트폰이 사용하는 세로 스크롤과 유사한 방식이라, 새로운 세대가 좀 더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품고 있습니다. 예쁘기도 하고요. 어디 이동하면서 읽기도 좀 더 편하죠. 지하철에서 서 있을 때 읽기 편하면 좋겠는데...
특허를 가진 제책 방식이라, 한국에서 이런 판형을 가진 책이 출시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출시된다면, 윗 페이지는 비운 상태로 책을 찍는 것도 고려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다 읽은 다음 뒤집으면 메모장...으로 쓰게요(실제로 일력은 쓰고 난 다음엔 메모장으로 많이 쓰입니다.). 읽은 책은 찢어서 버리라는 거냐-라고 생각할 수 있기에, 출판업 관계자 분들은 경악할 생각이긴 합니다만.
생각해보니, 오~래전 대본소 무협소설 판형에서도 뭔가 배울 점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요즘은 종이값이 올라가는 추세라 상황이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