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과 프로젝션 매핑 이야기
앨리스도 아닌데, 가끔 이상한 나라에 가고 싶었다. 출근길 바삐 걷는데 세상이 멈추고,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이 다가와 “아, 죄송합니다. 시스템 문제네요. 잠시 시간이 멈췄어요.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시면 다시 작동할 겁니다.”하고 말하는 느낌으로. 매일 똑같이 돌아가는 일상에서, 잠시라도 낯선 곳으로 탈출하고 싶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닌 걸까? 최근 몇 년간 우리를 이상한 세상에 빠트리는 미디어아트 전시가 부쩍 늘었다. 제주에서 열렸던 ‘빛의 벙커: 반 고흐 전’을 비롯해 DDP에서 선보인 팀 랩의 ‘teamLab: LIFE’전, 명동 그라운드 시소에서 열렸던 ‘포에틱 AI’까지 정말 다양한 전시가 열렸고, 열고 있고, 열릴 예정이다.
가끔 이상한 세계를 바깥으로 꺼내기도 한다. 서울 코엑스 전광판에 등장했던 공공 미디어아트 ‘웨이브’나, 일본 신주쿠에 나타난 초대형 고양이 전광판이 그렇다. 가짜인데 진짜처럼, 아니 진짜보다 훨씬 크게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것을 기술 세계에서는 가상현실, 또는 가상 환경이라 부른다. 따지자면 일종의 트릭아트지만, 원래 기술의 시작에는 마술이 있었다.
어떻게 이상한 나라에 퐁당 빠지게 되는 걸까?
주로 쓰이는 기술은 프로젝션 맵핑이다. 빔프로젝터를 이용해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영상을, 실제 벽이나 사물에 맞춰 투사하는 기술을 말한다. 실제 사물에 CG로 만들어진 옷을 입히거나,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면 된다. 옷을 어떻게 입는가에 따라 사람이 달라 보이듯, 프로젝션 맵핑도 사물에 옷을 입혀 다른 걸로 보이게 한다.
프로젝션 맵핑을 왜 많이 쓸까?
관객이 편해서 그렇다. 프로젝션 맵핑으로 만들어진 공간은 그냥 문 열고 들어가 즐기면 된다. VR헤드셋이나 안경을 쓸 필요가 없다. 그냥 들어갔을 뿐인데, 진짜 이상한 세계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냥 공간이니, 친구들과 함께 놀며 사진을 찍기도 좋다. 전시 공간을 제공하는 쪽에서도 편하다. 프로젝션 맵핑으로 만든 이상한 세계는 전원을 끄면 사라진다. 맵핑 대상인 설치물은 철거해야 하지만.
쉬운 기술처럼 보이지만 생각보다 어려운 기술이기도 하다. 그냥 영상을 비추는 건 간단한 편이지만, 그게 어떤 감동을 주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 영화관 영사기가 디지털 프로젝터로 대체될 만큼 프로젝터가 좋아졌고, 컴퓨터 성능이 강력해지면서 관련 콘텐츠를 쉽게 만들고 제어하게 됐다. 센서 부품 가격이 싸지면서, 인터랙티브한 영상을 제작할 수 있는 기반도 마련됐다. 이제야 프로젝션 맵핑으로 만들어진 가상 공간을, 불쾌함 없이 받아들이게 됐다.
왜 이제야 받아들이게 됐다고 말했을까?
실은 꽤 오래전에 발명되어 쓰이던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프로젝션 맵핑으로 만들어진 가상현실 환경을 CAVE(Cave Automatic Virtual Environment)라고 부른다. 1992년 미 일리노이 대학 시카고(UIC) 전자 시각화 연구소(EVL)에서 만든 말이다. 사람 하나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방에, CG 영상을 사방에 비춰서 가상 환경을 만드는 식이다.
꼭 프로젝션 맵핑만 이용해야 하는 건 아니다. 2012년 같은 연구소에서 출시한 CAVE2는 프로젝션 맵핑을 없애고 대형 디스플레이를 이용했다. 여기서 벽 하나를 떼서 만들면 벽(Wall)형 가상현실이라 부른다. 둥근 천장을 만들어 천장에 영상을 뿌리는 돔(Dome)형 가상현실도 있다. 어떤 형태의 VR이건 원리는 같다. 시야를 컴퓨터 그래픽이나 영상으로 꽉 채워서, 마치 그 공간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반드시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해야 한다는 법도 없다. 선사시대 벽화까지 올라가는 것은 무리더라도, 우리는 정말 오래전부터 이상한 세계를 만나길 원했다.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선보인 시네오라마(Cinéorama)에 들어가면, 10대의 영사기를 이용해 만든 360도 영상을 볼 수 있었다. 마치 열기구처럼 생긴 설치물 위에서, 관객은 기구를 타고 세계를 여행하는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고 한다.
하늘이 싫다면 말레오라마(Mareorama)도 있다. 움직이는 대형 파노라마 그림과 움직이는 배 모양 객석을 결합해, 마치 배를 타고 항해하는 느낌으로 세계 각국의 항구를 구경할 수 있었다.
뭐, 이런 인기 있는 영상 기술이 아니었어도, 벨 에포크 시대의 파리는 그 자체로 반짝거렸겠지만(슬프게도 이 시대로 데려가 주는 VR 콘텐츠는 아직 없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더 올라가면, 17세기에 개발된 근대식 프로젝터 매직 랜턴이 등장한다. 일종의 슬라이드 필름 프로젝터였던 이 제품은, 교육과 오락을 위해 쓰이다가, 18세기 판타스마고리아(Fantasmagorie)라는 콘텐츠가 만들어지면서 널리 퍼졌다.
물리학자이자 발명가, 마술사였던 에티엥 가스파르 로베르는 매직 랜턴을 벽과 연기, 반투명 커튼에 비춰 유령이 등장하는 무서운 세계의 이야기를 관객에게 들려줘, 큰 인기를 얻었다. 이후 19세기에 영화가 나타나기 전까지,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상한 세계에 대한 인간의 사랑은 결코 식은 적이 없다. CG가 없어도 디즈니랜드 같은 가상 세계를 만들어 사람들을 불러 모았으니까. 우리가 가상현실/증강현실/메타버스라 부르는 기술도, 이런 오래된 꿈이 디지털 기술과 만났을 뿐이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기술을 적당한 곳에 쓰면, 거기서 꽃이 핀다. 프로젝션 맵핑은 미디어아트 전시로 활짝 폈다. 프로젝션 맵핑을 물체에 투사해 인터랙티브하게 반응하는 기술도 여러 방법으로 쓰인다.
몇몇 레스토랑에선 먹으면서 즐길 거리로 제공하기 시작했다. 프로젝션 매핍 가상 환경 디스플레이를 이용해 영상을 촬영하는 버추얼 프로덕션, 또는 버추얼 스튜디오는 드라마 ‘만달로리안’을 비롯해 여러 콘텐츠 제작에 이미 쓰이고 있다.
우리는 이미, 가상현실 환경을 쉽게 만날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쉽게 만날 수 있다면, 가지고 싶어지는 법이다. 당장은 무리지만, 집이나 방을 그런 환경으로 바꾸고 싶은 사람은 분명히 있다. 360도 프로젝터 등이 싸진다면, 방을 수족관이나 게임 속 세계로 만드는 일이 유행할지도 모른다. 이상한 세계로 함께 들어갈 방법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 왜인지 호텔 방 같은 곳에서 먼저 채택할 듯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