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수사하는 남자가 있다
나는 탐정이다. 누군가의 부탁을 받아 사건 현장을 조사하고, 의뢰자의 문제를 해결한다. 흥신소와는 다르다. 옛날처럼 구리게 누군가의 뒤를 쫓아다니지 않는다. 2026년, 탐정은 사무실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다.
내가 수사하는 방법은 가상현실이다. 쉽다. 이 도시에 깔려있는 CCTV를 비롯한 영상 장치가 무려 몇 개일 거라 생각하나? 나는 그것들 중에 필요한 것을 모은다. 내 파트너는 그 영상들을 조합해, 현장과 비슷한 가상현실로 재구성한다. 선글라스와 비슷하게 생긴 안경을 끼고 사무실 한쪽, 텅 빈 방으로 들어가면, 나는 사건이 일어난 그때 그 장소로 돌아갈 수 있다.
오늘 수사 장소는 종로에 있는 오래된 모텔 방이다. 한때는 리뷰 평점 5점을 도배할 정도로 잘 나갔지만, 리모델링하지 못하고 10년이 지난 지금은 남의 눈에 띄기 싫은 사람이나 이용하는 싸구려 모텔로 전락한 곳이다. 의뢰자는 특이하게... 경찰이다. 그레고리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모 경찰서의 경감. 본명은 모르지만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그는 나를 볼 수도 없으니까.
하루 이틀 같이 일한 사이도 아니다. 탐정이 경찰과 같이 일을 하냐고? 물론이다. 조사 과정은 불법이지만, 조사 결과는 합법적인 증거로 인정받는다. 말이 안 된다 생각한다면, 이것을 기억해 달라. 지난 몇십 년간 법의학이 발달한 이유가, 이유 모를 살인 사건이 확 늘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 같은 탐정들이 조사한 보고서 없이 해결되는 사건은, 지금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다. 어차피 경찰 업무가 민영화된 지금, 경찰이나 우리나 그리 다르지도 않다. 낙하산 인사들이 경찰 고위직으로 내려간다는 것을 빼면.
사건은 간단했다. 지난밤 한 남자가 모텔방에 입실했고, 죽은 채 발견됐다. 사인은 약물 과다로 인한 심정지. 나이 27세, 이태원 한 호스트바의 인기 호스트다. 잘 생긴 데다 돈도 잘 번다. 솔직히 이런 곳에서 갑작스럽게 죽을 남자가 아니다.
경찰 쪽 의뢰이긴 하지만, 이런 의뢰라면 뒤에 다른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뭐,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나저나, 대체 이런 사건을 왜 조사해 달라는 거지? 별 것 아니지만 빨리 보고서를 달라는 것을 보니 더 미심쩍다. 잘생긴 남자를 조사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긴 하지만...
조사 시작
가볍게 중얼거리자, AR 안경의 작동이 시작된다. 검은 어둠이 걷히더니 눈 앞에 현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냄새는 안 나지만 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낡았다. 낡은 PC에 낡은 LCD TV, 웅웅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낡은 냉장고. 유치하게 어둡고 노란 조명에 속이 들여다보이는 욕실. 그런 것만 빼면 현장은 아주 깨끗하다.
방바닥에 쓰러진 남자가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텔, 방 안까지 녹화가 되고 있었다. 악취미네. 시간을 뒤로 돌려본다. 남자가 들어온다. 뒤돌아서더니 문을 본다. 그대로 뒤로 넘어진다.... 응? 뭐지 이건? 정상적인 동작 패턴이 아니란 생각이 들어, 파트너 Q에게 말을 걸었다.
Q, 혹시 영상에 조작된 흔적 없어?
- 흔적은 없습니다. 썅. Z에게 연락해 조사해 볼까요?
그렇게 해줘. 자료가 부족하니, 이 남자와 이 모텔에 관계된 추가 자료도 조사 부탁해.
썅-이란 소리에 반응하지 말자. 내 파트너는 사람이 아니니까. 맞다. 인공 지능이다. 한번 열 받아서 썅- 소리를 낸 적이 있는데, 그 날 이후 Q는 내 말투를 흉내 내, 부정적인 의견 뒤에 자꾸 저 소리를 붙인다. 흉내라고 하지만, 솔직히 억울하다. 하루에 몇 번이나 쓴다고.
Z는 네트워크 해커다. 정체는 모르겠지만, 네트워크 상에서 돌아다니는 개인의 금융 거래 정보를 모두 가지고 있다. 듣기로는 백업의 백업을 카피해서 사용한다고 한다. 암호화되어 있을 그 자료를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화폐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전자 페이로 바뀐 지금, 그가 가진 감시 영상과 전자 페이 정보를 합치면 누군가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알게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십 분 정도 기다리자, Z가 정보를 보내왔다. 급행료 명목으로 요금을 두 배 넘게 부른 것은 나중에 따지기로 하자. 역시, 영상이 조작되어 있었다. 원본 영상을 보니 죽은 남자 A를 밀어 넘어뜨린 다른 남자 B가 있었다. 음, 역시 잘 생겼다.
결제 기록을 보니 A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이 모텔에 왔다. 밀어뜨린 B는 이 모텔 종업원으로, 사건을 신고한 당사자다. 몇 달 전까지 죽은 남자가 일하던 호스트빠에서... 응? 같이 일하던 사이였다? 다른 결제 기록을 보니, 둘이 같은 날 비슷한 지역에서 결제를 한 내용이 많았다.
다시 안경을 켜고, 영상 속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서로를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기서 느껴지는 감정은 분명 사랑싸움이다. 맙소사. 애정 싸움을 하다 B가 A를 죽인 거라고? 실수를 덮기 위해 영상을 조작한 다음 경찰에 신고를 한 거고? 뭐야 대체, 이 흔해빠진 패턴은!
조사는 그렇게 끝났다. 너무 쉬운 사건이었다. 보고서를 발송하자 얼마 안 되는 페이가 들어왔고, 그중 일부를 Z에게 보내고 일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사건 종결 버튼을 터치하려는데, Q가 종결을 거부했다. 뭐 이딴 인공 지능이 다 있어? 라며 욕을 하려는데, Q가 말한다.
Z의 리포트를 다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급히 방에 들어가 안경을 썼다. 타임라인을 보니 확실히 뒷부분에 남은 자료가 있다. 빠르게 확인했다. 어라? B가 쓰러진 A를 두고 문을 열고 나가더니, 한 시간 정도 있다가 다른 사람을 데리고 들어온다. 얼굴을 스캔하니 인적사항이 뜬다. 본명 XXX, XX서 경감.... 닉네임은, 그레고리.
추가 전자 페이 사용 정보를 확인하니, 확실하다. 그는 B의 또 다른 애인, 또는 물주였다. 실수로 A를 쓰러뜨린 B가 놀란 마음에 그레고리 경감을 불렀고, 이 경감은... 약을 주사해 A를 죽였다. 그의 입장에선 라이벌 A를 없애고, A와 바람난 B까지 한 번에 손을 본 셈이다. 그리곤 거짓 보고서를 완성하기 위해 내게 조사를 의뢰했다.
제기랄.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걸 왜 발견하지 못했지? 이 자료가 왜 타임라인 순으로 정리 안되고, 나중에 추가 영상 마냥 붙은 거냐고. 누가 기록된 영상 시간에 손을 댔다. 하지만 이미 보고서는 내 손을 떠났고, 나는 돈을 받았다. 젠장. 이 나쁜 새끼.
그레고리에게 비밀 회선으로 연락을 했더니, 코웃음을 친다. 생각보단 뛰어난 탐정이었다는 비웃음도 잊지 않는다. 같은 남자끼리 뭘 그러냐고, 앞으로 계속 사건을 물어다 줄 터이니 잘 지내자는 회신이 돌아왔다. 같은 남자? 웃기지 마.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떻게 아냐고. 썅. 그리고 난, 잘 생긴 남자를 죽이는 새끼들이 제일 싫어. 그게 얼마나 귀중한 건데. 입술을 꽉 깨물었다.
Q, 이런 경우 보통 내가 어떤 짓을 하더라?
- 귀찮아. Z에게 연락해 다크 웹 서버에 관련 정보를 던져 넣어 달라 일러뒀습니다.
귀찮아, 는 내가 뭔가를 결심할 때 쓰는 말버릇이다. 귀찮아, 그냥 할래- 같은. 이 녀석 어느새, 이런 것까지 배웠담. 귀엽게시리. 참 잘했어요. 토닥토닥. 머리가 있다면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언젠가, 다른 누군가가 그레고리를 엿 먹이고 싶을 때가 올 때, 이 자료를 요긴하게 이용할 수 있을 거다. 이 인간 승진 심사가 언제인지 궁금해진다. 빠득. 그레고리가 엿 먹을 그 날이, 기다려졌다.
* 이 글은 아래 기사를 보다 생각나서 써봤습니다.
* 이 글의 주인공은 '데드맨 원더랜드'의 스캐가와 마사루-라는 캐릭터를 생각하며 적었습니다.
* 본문에 들어간 이미지는 PS3용 게임 '헤비 레인'의 스크린샷입니다. 해당 게임에선 AR 안경을 끼고 사건 조사 결과를 검토하는 형사가 나옵니다. 제스처로 VR 영상을 컨트롤하는 것이 인상적이죠. 특수 능력도 가지고 있는, 멋진 형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