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몽골
삶이란 때로 그렇다.
평온하고 안정된 삶일수록 은밀히 매설된 덫을
그 누구든 한순간 밟을 수 있다는 것.
생이라고 이름 붙인 여정에서 길은 그러므로 두 가지다.
멸망하거나 지속적으로 권태롭거나.
권태: 어떤 일이나 상태에 시들해져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
덫에 의한 멸망이거나 지속적인 권태라니, 삶이 참 암울하게 느껴진다. 선택지가 오로지 둘뿐이라면? 나이가 들수록, 그리고 이쯤 되니 스펙터클한 삶보다는 권태롭더라도 평온한 삶이 소중하다. 생각은 이럴진대 책을 읽으면서 얼른 구글맵을 열고 바이칼 호수, 올혼섬(이 책 여주인공이 죽음을 맞이한 곳)을 찾아본다. 알고 보니 나는 이미 그곳 가까이에서 지난 봄을 보냈다.
러시아 국경과 인접한 몽골의 홉스골 호수. 만발한 들꽃과 그들만의 세상을 사는 야크 무리, 그리고 아주 멀리 구름을 품고 있는 투명한 호수는 사람을 쉬 천국으로 데려다 놓는다. 책은 딱 두 권뿐이고 산책 말고는 딱히 다른 할 일도 없지만 권태로움은커녕 순간순간이 그리움이다. 맹렬히 풀을 뜯고 있는 야크 무리를 보고, 또 들으면서 극한의 몰입에 대해, 무리에서 떨어진 호모 사피엔스의 상실에 대해 생각한다. 난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장작을 집어넣고, 온기 앞에서 책을 읽고 어설픈 그림을 긁적거린다. 몽골 청년과 번역기를 돌려가며 어쭙잖은 인생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 수 없는 충만감을 느끼기도 한다. 문명에 점령되지 않은 이곳에 권태는 없다.
<주름>의 주인공 김진영은 천예린이라는 덫에 빠진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파트를 장만하고 상무로의 승진을 꿈꾸는 특별하달 것 없는 50대 중반의 김진영은 어느 날 아침, 늚음에 대한 자각과 함께 그동안의 삶에 회의를 느낀다. 그리고 우연히 화가이자 시인인 천예린을 만나고 평소의 자신과는 다르게 격정적으로 사랑에 빠져든다. 그러던 중 천예린이 갑자기 사라지고 그녀에게 적잖은 회삿돈을 건넨 김진영은 가족과 직장도 내버린 채 무작정 그녀를 찾아 나선다. 김진영은 애정과 증오라는 양가의 감정으로 집요하게 천예린을 쫓지만 그녀를 만나는 순간 다시 그녀를 뜨겁게 사랑하고, 불치병으로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리고 그 후에도 한참 동안 그녀 곁을 지킨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권태로운 삶을 살던 그가 아니다. 그에게 천예린은 '덫'이었을까.
예순을 앞에 둔, 더군다나 한쪽은 가정도 있는 처지에 첫눈에 반한, 불꽃같은 사랑이라니. 사랑은 살짝 미치거나 제대로 미치는 거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최근 사랑에 관한 설문조사를 토대로 한 연구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성인 10명 중 1명은 평생 한 번도 '열정적인 사랑'을 경험해 보지 못했으며, 젊은층보다 노년층에서 열정적인 사랑을 더 많이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연구팀은 사회적 인식의 개선과 인격적으로 성숙해진 결과라고 분석했다. 이처럼 사랑은 특정 세대의 전유물이 아닌, 노년을 포함해 인생의 여러 시기에 반복될 수 있는 감정이라고 한다. 어쩌면 인간 본성의 감정인 사랑에 물리적 나이를 들이대는 것 자체가 모순일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사랑은 광기와 함께 시작되니 나이 불문이다.
평생에 걸쳐 아주 드물게 일어난다는 이 일이 권태로움에서 우리를 구해낼지는 모르겠으나 덫은 되지 않기를 바라본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나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박범신, <은교>
"노년에게는 자연이 명령하는 정답이 더 이상 없는 만큼, 우리는 우리만의 정답을 찾을 수 있는 꿈과 자유와 여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김대식, <김대식의 빅퀘스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