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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T Sep 04. 2018

사람여행: 3. 두개의 등대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등대 앞에 선 등대지기의 머나먼 여정

“항구에 가면 등대가 두 개씩 있어요. 흰색과 빨간색. 그 사이로 배가 들어오는 거죠. 등대가 하나만 있다면 배가 등대 왼쪽으로 갈 지 오른쪽으로 갈 지 방향을 잡지 못할 수도 있고, 항구에 부딪힐 수도 있어요. 그래서 항구엔 등대가 두 개씩 있는 거에요. 저도 두 개의 등대처럼 방향을 잃고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불빛을 비춰주고 싶어요”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다이나믹했던 과거도, 고단한 삶 속에서도 희망의 빛을 밝히는 현재도, 화려하게 빛날 미래도 이 한 문장에 다 담겨있었다. 캄캄한 인생의 바닷길에 두 개의 등대가 우뚝 서기까지 작가 ‘두 개의 등대님’이 겪은 세 번의 터닝포인트, 그리고 그 때마다 자신을 일으켜 세운 세 개의 선언들.




첫 번째 선언- “제가 하겠습니다”


고 3, 수능을 앞둔 그는 부모님께 재수를 하겠다며 폭탄 선언을 했다. 무엇을 해야할 지, 무엇을 잘 하는지도 모른 채 고단하게 이어지는 수험 생활은 그를 지치게 했다. 유년 시절 개구쟁이였던 그는 점차 내성적으로 변했다. 다소 왜소한 체구였고, 공부도 운동도 특출 나게 잘하는 것도 아니어서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그는 점점 자신의 생각을 안으로 안으로 묻어두고 숨기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런 그의 입에서 나온 ‘재수’라는 외침은 놀랄만한 것이었다. 그는 재수를 염두 해두고 공부가 아닌 게임에 몰두했다.


하지만, 수능시험에서 그는 뜻밖의 수확을 거두었고, 화학공학과에 진학했다. 뜻밖의 상황에 그는이륙하자마자 랜딩 기어를 넣고 땅으로 꺼져 들어갔다.


“대학생이 되면 열심히 놀아야 할 것만 같았어요. 그렇다고 남들처럼 학점 관리나 미래 계획을 세워 두며 노는 것도 아니었죠. 수업 땡땡이는 기본이고 시험 때 제일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와 백지 답안지를 제출하는 걸 훈장으로 알던 시절이었어요. 학사 경고도 두 번이나 맞았죠”


고교 시절 좋아하던 화학이었지만, ‘공학’에 대해서 전혀 몰랐고 깊이 고민을 하지 않고 진학했기에 ‘화학공학’이 적성과 맞을 리 없었다. 컴퓨터로 직접 조립하고, 프로그래밍 언어도 독학으로 해보려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전과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사람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2박 3일 일정으로 동아리 MT를 떠났는데 돌아오는 날 전과 면접이 잡혔어요. MT 내내 술 마시고 노느라 제대로 씻지도 않고 술 냄새도 났는데 그 모습 그대로 면접장에 간거죠. 성적이 좋은 것도 아닌데다, 다룰 줄 아는 프로그래밍 언어도 없었고, 면접 태도마저 불량했으니 전과가 될 리가 없었어요”


돌이켜보니 이불킥을 해도 몇 번 해도 모자랄 상황이었다는 그. 하지만 당시에 큰 자각 증상이 없었던 그는 군생활을 마친 후 복학해서 비로서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았다. 우연한 기회에 과 학생회장 권유를 받은 것. 저절로 과 학생회장이 되는 줄 알고 별 생각없이 답한 그였지만, 알고 보니 다른 출마자도 있었다. 하지만 그 시행착오는 그에게 책임감과 성취감을 맛보게 해 준 계기가 되었다.


“포기할까 생각도 했지만 도와주는 친구들도 있어서 열심히 발로 뛰면서 유세도 했어요. 그렇게 당선이 되면서 성취감을 처음 맛봤죠. 그 때의 그 성취감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것 같아요.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하고 소극적이었던 제가 사람들과 함께 힘을 모아 다양한 경험을 하고, 더 나아가 리더로서의 자질도 기를 수 있게 되었거든요”


될 대로 되라며 막 살던 철없던 그는 더 이상 없었다. 성취감과 책임감을 알게 된 그는 교내 태국 봉사 모임을 신청했고, 오리엔테이션 자리에서 팀장을 자청하기에 이르렀다.


“교수님께서 팀장 하고 싶은 사람 손 들라고 하셨는데, 서로 눈치만 보고 아무도 들지 않았어요. 내심 하고 싶었지만 눈치가 보여서 저도 가만히 있었죠. 그런데 교수님께서 우리들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형에게 회장을 시키려 하는 거에요. 그래서 서둘러 손을 들고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외쳤죠. 처음엔 다들 ‘쟤 왜 나대’라는 반응이었지만 지금은 10년 넘게 우정을 이어오고 있는 사람들이 됐어요”


그렇게 ‘재수하겠습니다’라고 외치며 호기롭기만 한 그는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외치는 리더가 되었다.



두 번째 선언- “세계일주 하겠습니다”


비행기도 타본 적 없고, 외국에 나가본 적도 없는 그는 해외 봉사대 리더로 태국에 발을 딛었다. 좋은 사람들과 의미 있는 일을 하며 행복을 느낀 그는 다시 한 번 큰 결심을 하게 됐다. 영어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두 번째 터닝 포인트였다.


“영어 연수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돈은 없었어요. 어머니께서 어릴 적 받은 세뱃돈 등을 모아 500만원을 만들어 놓으셨는데 그걸 쓰겠다고 선언했죠. 필리핀에서 먼저 연수를 하고, 호주로 넘어가서 일을 구해 돈을 벌고 어학원을 다니는 계획을 세웠어요. 그렇게 필리핀과 호주행 항공편을 끊고, 어학원을 등록하니 남는 돈이 없었어요. 귀국 비행기 티켓 값도 없이 말 그대로 배수의 진을 쳤죠”


그렇게 밑그림만 그린 채 호주에 입성한 그. 하지만 막막한 상황 속에서도 왠지 한국인 사장 밑에서 우리 말을 쓰며 일하고 싶지 않았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사람에게 정보를 얻은 그는 무작정 시골 농장으로 찾아갔다.


농장에 일자리를 얻는 것 까지는 좋았지만 수확기간이 끝나면 일감이 떨어져 돈을 벌 수 없었다. 농번기에 벌어놓은 돈으로 연명해야 하는 호주판 ‘보릿고개’였다. 일은 일대로 고되고, 영어를 배울 기회는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농장에서 한 한국인 친구를 만났고, 그 친구의 지인이 농장에서 돈을 벌어 세계일주를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스타얼라이언스같이 동맹 항공사들끼리 지구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티켓을 싸게 내놓은 게 있다고 하더라고요. 희망도 꿈도 없는 나날들이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생기가 돌았어요. ‘가슴이 뛴다’는 경험을 처음 했죠. 가족들에게 ‘난 세계일주 하겠습니다’라고 선언했어요. 목표가 생기니 삶 자체가 달라졌어요. 지친 몸을 이끌고 한국 드라마를 보다 잠드는 지루한 일상에서 비로소 탈출할 수 있었어요”




지구 한 바퀴를 돌 운명이었는지 때마침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농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자금을 마련해 호주를 떠나던 날 그는 복받치는 감정에 눈물을 펑펑 흘렸다고 한다.


“호주를 떠나는 날 새벽이었어요. 당시 유행하던 지인의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보는데 브라운아이드소울의 ‘그런 사람이기를’이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오더군요. 내가 해냈다는 뿌듯한 감정도 들었고, 다른 친구들은 대도시의 번듯한 어학원을 다니는데, 시드니 조차 가보지 못하고 시골만 전전했던 서러움이 밀려와 펑펑 울었어요. 룸메이트가 깰까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조인성이 입에 주먹을 넣고 울었던 것처럼 울었어요”


그렇게 그는 8개월동안 동남아와 인도, 중동, 유럽, 모로코, 남미 등 전 세계를 누비며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그 때 작성한 일기는 지금 그의 브런치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글과 친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20대의 치열했던 삶은 그를 글의 세계로 인도했다.



세 번째 선언- “휴직하겠습니다”


과 학생회장에 봉사활동, 그리고 세계일주까지… 그만의 독특한 경험은 취업시장에서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는 큰 어려움 없이 한 기업체에 입사하며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사회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결국 그는 1년 만에 퇴사를 했다.


취준생으로 돌아온 그는 높은 현실의 벽을 절감해야만 했다. 그 때 그의 손을 잡아준 사람이 바로 지금의 배우자다. 태국 봉사활동길에 처음 동행했던 그녀는 그의 인생길을 함께 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후 재취업에 성공한 그는 결혼을 했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하지만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 사람 사이에서의 갈등, 그리고 가장으로서의 무게가 그를 짓눌렀다.


“시련을 겪으면 나아지겠지 하고 마음을 다 잡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어요. 평생 이런 취급을 당하며 살아야 하나라는 절망감과 자괴감이 들었죠. 제가 뭘 하고 싶은지, 뭘 잘 할 수 있는지도 몰랐어요. 일에 치어서 집에 돌아오면 육아라는 또 다른 세계가 저희 부부를 기다렸어요. 결단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나온 말이 바로 ‘휴직하겠습니다’에요”


그는 육아휴직을 쓰고, 아이 곁을 지켰다. 그러면서 본인이 진정 원하는 것, 하고싶은 것을 찾아나서는 일도 병행했다. 아이와 아빠가 함께 자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휴직 전과 휴직 후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아이도 정서적으로 많이 안정이 되고, 말문도 트이더라고요. 저 역시 무엇을 해야할 지 발견했고, ‘왜 이렇게밖에 살 지 못할까’라는 마인드가 긍정적으로 바뀐 게 가장 큰 수확이죠”


그의 목표는 라이프 코칭이다. 배가 항구에 잘 도착할 수 있게 캄캄한 어둠을 뚫고 빛을 밝히는 두 개의 등대처럼 그는 방향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을 위한 등대가 되고 싶어한다. 수업 땡땡이를 치고 학사경고를 받고 무계획적으로 퇴사를 감행했던 그는 자신의 어둠을 발판 삼아 묵묵히 등대에 올랐다. 아니 어쩌면 그 두 개의 등대는 이미 빛을 발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로운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 수단으로 택한 게 바로 라이프 코칭과 글쓰기죠.사실 학창시절 독후감 분량 채우는 걸 버거워 할 정도로 글과 친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이 말을 잘해야 하는 일임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말을 잘하기 위해서는 제 생각을 잘 정리해 글로 잘 써두는 것이 선결되어야 하는 것도 느꼈죠. 그렇게 글쓰기 수업을 듣고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앞으로도 글을 통해 생각을 정리하고, 상처받았던 마음을 치유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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