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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T May 03. 2018

오바사

'오바'하지 않는 삶을 위하여...

그림출처: 그림왕 양치기


“오바사!”
   

짧고 굵은 외침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찬찬찬 잔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고, 황금색 물결이 번져나갔다. 서핑족들이 감탄하는 하와이의 파도 못지않은 금빛 물결이었다. 


그 금빛 물결의 또 다른 이름은 ‘소맥 폭탄주 파도타기’, 혹은 ‘회식자리에서 억지로 술 마시기’다.


그 날은 올 한해도 잘해보자는 빌미로 ‘신년회’가 벌어진 날이었다. 그렇게 마련된 술자리, 노릇노릇 익어가는 삼겹살 연기를 헤치고 나온 오바마 대통령은 TV 모니터 속에서 취임 선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바사’가 뭐냐고? 회식자리에서 오고 간 그들의 대화를 잠시 들어보자.
   
   
꼰대: (TV를 잠시 응시한 뒤 미소를 지어보이며) 사장님, 오바마의 시대가 왔다지만 그의 전성시대가 열리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사장: (심드렁하게 ‘그래 한 번 들어나 보자’는 표정으로) 그럼 어떤 시대인데?
꼰대: 이젠 오바마의 시대가 아니라 오바사의 시대입니다.
사장: 오바사? 그게 뭔데?
꼰대: 잠시만요. 오바사가 뭐냐면요... (갑자기 휙 뒤돌아 직원 쪽을 응시하며) 얘들아, 뭐하냐. 잔들 채워
직원들: (‘뭐지?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라고 되 내이며 마지못해 잔을 채운다)
꼰대: 직 라보는 건 장님뿐, 사장님 사랑합니다! 자 다같이 건배사 외칩시다. 오바사!!
사장: (만면에 미소를 띄며) 허허허, 아이 이 사람 뭘 그런 걸 해...
직원들: (지x들을 해요, x랄들을...)
   
   
신년회였지만 올해도 다들 잘 해봅시다라는 유대감을 갖게 하는 그 무엇도 없었다. 그 자리엔 듣는 순간 연탄불 위 오징어처럼 오그라들 수밖에 없는 마법의 단어 ‘오바사’만 있었다.
   

오바사... 사전에도 없고, 직관적으로 유추할 수도 없는 이 괴랄한 단어의 또 다른 이름은 ‘아부(阿附: 남의 비위를 맞추어 알랑거림)’일 것이다.
   

본인의 능력과 실적으로만 평가 받지 못하는 세상, 그래서 아부는 선택이 아닌 필수일지도 모른다. 효율성을 중시하는 사람에게 아부는 인풋 대비 최고의 아웃풋을 뽑아내는 최상의 전략일 것이고, 능력이 없거나 성과를 내지 못하는 사람에게 아부는 유일무이한 생존 전략이다. 그래서 위의 꼰대들도 성과를 내기 위해 전략을 수립하고, 자기개발을 하면서 노력할 바에 차라리 ‘오바사’ 따위의 단어를 연구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으리라…
   

아부로 쌓은 마천루의 스카이라운지에서 아부를 하는 자와 받는 자는 그들만의 욜로 라이프를 즐기고 있다. 언뜻 보기에 그들은 매우 행복해 보인다. 하지만, 모래성과 같은 이 아부의 마천루는 언젠가 필연적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다. 마천루의 정점에 있던 욜로족은 골로족이 되어 뒤안길로 사라졌다. 적어도 내 직장생활 16년간은 단 한 차례의 예외도 없었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고 하기엔 표본이 너무도 많고 확실하다. 그들에게는 눈가리고 아웅해서 위기를 잠깐 뒤로 미룰 수 있어도, 위기를 해결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아부를 할 수밖에 없는 사회생활... 이는 우리네 기업문화, 조직문화가 만들어 낸 후천적 악습일 것이다. 하지만, 이를 뒤집으면 아부는 선천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된다. 우리 모두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소중한 생명체였다. 지금도 그렇다. 아부를 해야 하는 사람, 아부를 받는 사람의 역할을 정하고 세상 밖으로 나온 사람도 없다. 



모두가 일고 있는 진실. 하지만 내가 먼저 아부를 포기했다가 나만 손해 볼 것 같아 남이 먼저 내려놓아주기를 바라며 눈치를 살피는 불편한 진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지금도 앞으로도 아부라는 무기는 내려놓을 것이다.
 

그래야만 아부(阿附)를 버린 빈 자리에 여러 다른 좋은 의미의 아부를 채워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我)는 특정인과 특정 부서에 종속되지 않은 나 자체로도 하나의 독립되고 완전한 부서(部)다. 그리고 아부를 하지 않는 나(我)는 떳떳한 아버지(父)이자 남편(夫)이자 아내(婦)다. 이를 바탕으로 나는 스스로 부(富)가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바사를 낯간지러운 말이 아닌, 내 자신을 위한 마법의 주문으로 바꾸려고 한다. ‘오바하지 말고 랑하자, 를’이라고. 멋지지 않은가. 그렇게 난 스스로를 위해 마법의 주문을 외쳐본다.


“오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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