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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T Jan 06. 2019

매운맛 포비아

빨간 맛 속에 숨어있는 또 다른 ‘레드 콤플렉스’


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치명적인 약점(?)을 하나 가지고 있다. 매운 음식을 잘 못 먹는 것이다. 음식 취향이 약점이 될 수 있냐고?  



집밥, 그리고 음식점 상차림을 떠올려보자.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색깔은 빨간색일 것이다. 우리 음식 대부분은 ‘빨간 맛’을 내고 있다. 한국의 대표 음식 김치를 비롯해, 각종 밑반찬엔 고춧가루가 들어가고 찌개와 탕, 볶음요리의 주재료도 고추장이다. ‘한국인의 맛=매운 맛’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렇다고, 매운 음식을 아예 입에도 대지 못하는 건 아니다. ‘적당히 얼큰한’ 음식은 좋아한다. 맛깔스러운 김치는 최고의 반찬이고, 매운 단계 ‘보통’ 수준의 떡볶이는 즐겨먹는 간식이며, 매운탕 육개장 짬뽕 등 ‘일반적인’ 수준의 얼큰한 국물은 선호하는 음식 중에 하나다. 심지어 겨자나 와사비의 톡 쏘는 알싸함은 즐기기까지 한다.



그런데, 같은 음식이라도 본격적으로 매운맛을 강조하고 나선 음식들은 먹기 힘들다. 일반 한식집의 낙지볶음은 좋아도 시내 유명한 낙지골목의 낙지볶음은 너무 매워 먹기 어렵다. 손님들이 먹고 버린 우유팩이 훈장처럼 쌓여있는 매운 떡볶이, 매운 짬뽕, 매운 닭발, 매운 갈비찜은 넘볼 수 없는 존재들이고 극한의 매운맛으로 유명한 인스턴트 볶음 라면은 아예 먹을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내가 매운 음식을 꺼려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괴롭기 때문이다. 내게 매운 음식으로 인한 괴로움은 과음 후 숙취와 다를 바가 없다. 매운 음식을 먹으면 일단 혀가 맵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속이 맵고 어김없이 화장실과 한 몸이 된다. 그렇게 화장실에서의 몇 차례 폭풍이 지나가면 위 아래 위 위 아래로 향하던 아릿한 통증은 뒤로 향한다.



이쯤 되면 매운맛은 내겐 고문이나 마찬가지다. 실제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다섯 가지 맛은 단맛 쓴맛 신맛 짠맛 감칠맛이라고 한다. 매운맛은 미각의 영역이 아닌 통각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기에 내가 매운맛을 맛이 아닌 통증으로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사람들은 땀을 뻘뻘 흘리고 우유를 연신 들이키면서도 최고 난이도의 매운맛에 도전하는 자체가 즐거움일 지 몰라도 내겐 가학적 행위다.



그렇게 사람들은 매운 걸 먹으며 스트레스를 푼다는 데, 난 오히려 매운 음식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다. 몸의 고통은 차치하고라도, 매운 음식을 싫어한다고 하면 취향과 기호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별난 사람 취급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매운맛에 있어서는 배려를 받기도 힘들다. 직장인 시절 점심 메뉴 선정 시 매운 음식으로 의견이 모아지면 어쩔 수 없이 빠졌고, 전원 필참 명령이 떨어진 회식을 매운 갈비찜 집에서 했을 땐 빈속에 술만 연신 들이켰던 적도 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견딜만하다. 매운맛이 공포로 굳어져버린 건 바로 ‘남자답지 못하다’는 편견 때문이었다. 매운 음식 앞에서 젓가락만 깨작거리는 날에 사람들은 ‘남자가 그 정도도 못 먹어’, ‘남들 다 잘 먹는 걸 시도조차 안해보는 겁많은 찌질이네’라는 반응을 보인다. 매운맛을 통해 내 성격과 자아까지 규정되는 것이다.



최근 직장 회식자리나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 등에서 술을 강요하고, 술에 취해 똥 군기를 잡는 모습이 여러 차례 공개되면서 주폭 문화에 대한 경각심이 일어나고 있다. 담배 역시 비흡연자들 앞에서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매운맛은 여전히 이해와 배려의 영역이 아니다. 여러 식성과 취향 중에 하나지만 매운 음식을 못 먹는 사람은 못난이다. 나와 다른 식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입이 짧고 까다로운 사람이다. 



매운맛 포비아를 떨쳐내기 위해서는 개인 식성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 필요하다. 하지만 요원해 보인다. 매운맛을 부정하는 것은 곧 죄악이기 때문이다. 매운 음식에는 한국인의 소울 푸드 김치와 국민간식 떡볶이 등이 포함되어 있고, 매운 음식에 대한 비판은 곧 우리나라 음식문화에 대한 비하로 받아들여진다. 그렇기에 한국사람이라면 매운 음식은 무조건 잘 먹어야 하며, 매운 음식은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고마운 영혼의 동반자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물론, 매운맛 그 자체엔 아무런 문제도 없다. 하지만 매운맛을 강요하거나, 매운맛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문제아로 낙인찍는 건 또 다른 ‘레드 콤플렉스’다. 밥상머리에서 펼쳐지는 ‘레드 콤플렉스’ 속에서 여전히 난 선택을 해야 한다. 사람들과 어울려 매운 음식을 먹으면서 ‘모나지 않게’ 행동하고 후폭풍을 감당하느냐, 아니면 식성 별난 사람으로 살면서 뱃속은 편하지만 마음 불편하게 사느냐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순간들이 종종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혀보다 더 아린 건 내 마음일 것이다.




Copyright(C) Jan.2019 by Writer T.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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