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는 만사일까 아닐까
“선배 새해인사를 얼굴 뵙고 해야 하는데 전화로 해서 죄송해요”
지난 설날, 카톡으로 새해 메시지를 남긴 후배가 아차 싶었는지 얼마 전 전화를 걸어왔다. 새해인사를 직접 얼굴보고 해야 하는데 연초에 바빠 이렇게나마 대신했노라는 사과의 전화였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오히려 내가 사과를 했다. 내가 그동안 널 꼰대처럼 대한 것 같다고. 회사를 그만둔 뒤 인사 문자나 안부 전화는 예년대비 반토막이 났다. 그런 가운데 잊지 않고 나란 존재를 생각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그런데 제 때 인사를 못했다고 미안해하니 몸 둘 바를 몰랐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인사를 강요받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인사는 상대방의 안부와 안녕을 기원하고 따뜻한 마음을 주고받는 마음의 핫팩이 아니라 얼음장 같이 차가운 의무가 되어 버린 것 같다.
물론, 인사 그 자체에 대해, 자발적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와 하는 인사에 대해 문제 삼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인사를 강요했을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누군가는 강요하고, 다른 누구에게는 의무가 되었을 때 인사는 더 이상 미풍양속이 아니다.
인사라는 행위에서 중요한 건 그 사람이 전하는 진심과 마음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형식과 겉치레에 얽매여 있다. 허리를 숙이고 큰 소리로 인사하지 않으면 버릇없다, 예의 없다는 말이 뒤따라온다.
나 역시 사회생활을 하면서 큰 조직에 몸담을 때가 있었다. 때로는 바빠서, 때로는 중요한 통화를 하며 지나가느라 90도로 허리를 숙이지 못한 채 인사를 한 적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난 인사 안하는 사람 더 나아가 예의 없는 사람이 된 채 뒷담화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인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건 비단 나 뿐만은 아닌 것 같다. 회사에서는 신입사원들에게 군대 신병처럼 언제 어느 때나 큰 목소리로 인사 할 것을 강요하고 있고, 심지어 목소리 데시벨 여부가 ‘업무 적응력’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또, 인사를 강요하는 건 중년의 꼰대들만은 아니다.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에 올라오는 대학교 학과 단톡방을 보면, 선배들은 신입생들을 향해 ‘언제 어디서나 큰 목소리로 인사’ 할 것을 강요하면서 동시에 ‘학교 반경 몇 미터 내에서는 흡연금지’, ‘(여학생의 경우) 미니스커트와 매니큐어, 머리 염색 금지’ 등 인사와 발맞춘 드레스 코드(?)를 제시하기도 한다. 꼰대 문화에 치어서 반기를 들어야 마땅할 젊은 세대들조차 꼰대 문화를 여과 없이 캠퍼스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악순환은 세대를 거쳐 계속된다.
그렇다면 언제 어디서나 큰 어디서나 군대식 인사를 하지 않는 사람은 예의 없는 사람일까? 내성적인 사람의 경우 낯선 환경과 사람들이 어색할 수도 있고, 대기업이나 대학교 같이 큰 조직의 경우 사람이 많아 한 두 명 정도 미처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지나칠 수 있다.
고의로 인사를 거르는 경우가 아니라면 ‘너 왜 인사 안 해’라고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상대방이 어색해서, 혹은 바빠서 인사를 건네지 못했다면 내가 먼저 다가가서 인사를 해도 되는 것 아닌가? 왜 꼭 후배가 선배에게, 직원이 임원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먼저 인사를 해야 하는 것인가?
이 일그러진 인사 문화야 말로 형식이 본질을 왜곡시키는 대표적인 사례다. 인사를 강요하는 사람들의 공통점도 대체로 비슷하다. 타인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인정받으려는 욕구를 인사를 통해 풀려고 하는 것이다. 또한, 마음으로 다가가지 못해 좋은 평판을 얻지 못하고 지위나 권위를 이용해 상대방에게 좋은 평판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정작 본인은 남들에게 인사를 잘 하지 않는 부류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사는 만사가 아니다. 남에게 강요하는 인사를 받는 게 곧 ‘인싸’는 아니라는 얘기다. 아니, 인사는 만사다. 그런 사람들이 선배로 임원으로 우리네 인생길의 주요 길목을 막고 있어서는 안 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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