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고 빠른 효율적 수단, 애써 외면해야 하는 이유
“그 분들 아니었으면 이 나라는 없었어”
“한국 사람들은 풀어주면 안 돼. 바짝 조여야 말을 듣지”
“초반에 기선제압해. 그래야 네가 편해진다”
주위를 살펴보면 독재자들을 찬양하거나 독재 시절에 대한 향수를 드러내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또, 독재 리더십을 ‘카리스마’로 미화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독재 찬양을 끔찍이 싫어한다. 독재 찬양론자들 앞에서 ‘독재 때문에 발전한 게 아니라, 독재 때문에 더 발전할 수 있었는데 못한 것’이라고 반박하거나 ‘경제적으로는 성장했을지 몰라도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는 등 소중한 가치와 맞바꾼 성장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열을 올린 적도 많았다. 실제로 독재자들의 최후는 대부분 비극으로 막을 내렸고, 우리나라 역시 길고 긴 독재의 후유증을 혹독하게 겪어내고 있다.
그런데 세상살이를 해 나가면 나갈수록 그토록 경멸하고 증오하는 독재가 가장 효율적인 수단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 씁쓸하다. 학창시절 조별과제도 그랬고, 직장생활 하다못해 각종 모임에서까지 독재자가 있는 그룹의 성과가 좋은 건 부인할 수 없다.
요즘 대학생들 커뮤니티에서는 조별과제 얌체족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글을 종종 볼 수 있다. 과제 제출 시 얌체의 이름과 학번을 빼고 올렸다는 글에 통쾌함과 공감을 드러내는 학생들도 많다. 그러면서 일부 학생들은 조별과제 성공사례를 공개하기도 하는데, 성공의 핵심은 ‘팀을 이끌 강력한 리더, 엄격한 규칙, 규칙 위반 시 제외’ 등이었다.
회사는 또 어떤가. 능력을 인정받는 상사를 보면 사람 좋은 상사보다는 독재 스타일로 밀어붙이는 상사가 더 많다. 때로는 독재자 오너나 상사를 둘러싸고 갑질 폭언 폭행 논란 등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성과를 낸 사람들에 한해서는 ‘성과(혹은 대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 등 한껏 미화된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나 역시 16년차 직장인으로서, 그리고 크고 작은 모임을 이끌면서 독재자는 되지 말자고 굳은 결심을 했다. 선배들의 인격모독에 가까운 똥 군기가 싫어서 내가 팀장이 되면 저러지 말아야지 다짐했고, 후배들이 생기면 살뜰히 챙기려 노력했다. 팀장이 되어 팀원들을 이끌면서 사소한 것 하나까지 뭐든지 의견을 구하고 논의를 해서 결정했다. 독단적으로 결정해 밀어붙일 때보다 속도도 더디고, 가시적인 성과도 나지 않고 때로는 잡음도 많았지만 수평적인 조직을 만들고 싶었다. 더디더라도 건강한 조직문화를 구축하면 그 뒤에 성과는 자연스럽게 착착 따라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게 하고, 조직의 입장과 개인의 의견이 충돌할 때 최대한 개인의견을 반영하려 했던 배려는 ‘만만함’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일부 팀원들은 팀장인 내 말은 제대로 듣지 않고, 오히려 바로 내 밑에 군기를 잡는 무서운 팀 내 서열 2위에게 꼼짝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팀장으로서 팀원들을 위해 윗선의 강압적 지시에 반기를 들기도 했고, 팀원들을 대표해 싸우면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팀원들은 평소 ‘만만한’ 나를 지나쳐 강압적인 지시를 내린 윗선에 아부를 했다. 결국 나만 바보가 되었고, 부당 지시에 대한 내 항변은 ‘일 하기 싫은 자의 변명’이 되었다.
팀장이 되고 난 직후 먼저 팀장을 경험해 본 선배들이 ‘야 애들 너무 풀어주지 말고 초반에 기선 제압해’, ‘꽉 잡아놔. 안 그러면 네가 힘들어져’라고 조언한 그 말에 처음으로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였다.
개인적인 모임에서도 이런 현상은 일어난다. 독재자 스타일의 리더가 있는 모임은 잡음이 나오지 않는다. 속으로 독재자 리더를 욕할지언정 겉으로는 평화로운 모습이다. 그런 조직에서 독재자 리더는 일사분란하게 역할 분담을 하고, 업무 지시를 한다. 일의 능률은 오르고 가시적인 성과물도 나온다.
반면, 수평적인 문화를 지향하는 모임에서는 저마다의 사정을 고려하고 배려하다보니 성과가 지지부진한 경우가 많다. 참다못해 쓴 소리를 하는 사람이 생기면 ‘왜 저래’라는 반응도 나온다. 그렇게 잔소리가 쌓이게 되면 본인의 행동을 돌아보기 보다는 ‘왜 내게 싫은 소리를 하는 거지’라고 반응하고, 구성원들 간 갈등의 골은 깊어진다.
상명하달식 조직 문화와 권위주의적인 꼰대들에게 몸서리치고 수평적 리더를 원하지만 정작 독재자들이 끌고 가야지만 겨우 움직이는 구성원들, 독재는 나쁜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외치지만 정작 독재가 더 효율적일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 이런 상황 속에서 나 역시 수평적인 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몰라주는 후배들이 야속하기도 했고, 성과의 속도가 나지 않아 윗선으로부터 쪼임을 당할 때는 스타일을 바꿔볼까 고민도 했다. 개인적인 모임에서는 독재자 스타일의 리더가 되어 쉽고 빠르게 목표를 달성한 적도 있다. 지나고 나서 후회했지만 마약과도 같은 효율성에 또 유혹이 생기곤 한다.
하지만, 내 의미 있는 시도가 무산되는 게 아쉬웠다. 선배들로부터 이어진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싶었다.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쉽고 빠른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이유로 독재를 선택한다면 사회 곳곳에서 독재는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정치적으로 군부독재의 시대를 종식시켰어도 일생 생활 곳곳에서 독재는 뿌리를 깊게 내릴 것이고, 우리는 독재가 시스템화 된 사회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독재의 유혹을 참고 이겨내야 한다. 당장 성과가 없더라도, 사람들이 내 마음 같지 않더라도 참아야 한다. 아울러 팀의 리더가, 그리고 구성원 중의 누군가가 독재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구성원 스스로도 책임과 의무를 다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독재자는 설 자리를 잃을 것이고 이 아이러니한 독재의 명분도 사라질 것이다.
나 몰라라, 혹은 될 대로 되라, 나는 책임 안 져 라고 생각하는 사이 독재의 싹은 그 틈을 파고들며 자라난다. 독재는 목표달성을 빠르게 해줄지언정, 상처만 남긴다. 리더와 구성원들은 서로 가시돋힌 말과 행동을 주고 받으며 조직은 썩어들어간다. 상처는 쉽사리 아물지 않으며, 아문다고 해도 관계가 독재 이전 시점으로 완벽히 회복되긴 어렵다.
결국 독재(獨裁)는 독재(毒在, 독이 되어 남는 것)다. 독재의 독이 퍼진 땅 위에서는 아무 것도 자라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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