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 TV 모니터에 지치는 연예 기자들... 승자 없는 게임은 언제까지?
‘왜 예능을 예능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니...’
TV 예능프로그램에서 지나치게 진지한 태도를 보이거나, ‘예능감’이 떨어지는 출연자를 두고 종종 저런 말들을 한다. 농담을 농담으로 받지 못하고 정색하는 바람에 싸해진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던지는 애드리브이기도 하다.
그런데 예능을 예능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니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연예부 기자들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TV 모니터’ 담당 기자들이다. TV 모니터는 평일 밤과 주말 저녁, 주요 방송사들의 간판 드라마와 예능을 시청하면서 실시간으로 그 내용을 속보 기사로 전송하는 행위를 말한다.
2000년대 초 온라인 연예 매체들이 우후죽순 늘어나면서, 각 매체들은 경쟁력을 위해 TV모니터 기사를 게재하기 시작했다. 본방사수를 놓친 시청자들을 그대로 독자로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이었다. 당시만 해도 스마트폰이 없었고, VOD 서비스가 지금처럼 발달하지 못해서 본방송을 놓치면 재방송을 기다리거나 해당 방송사 홈페이지에서 전용 뷰어를 다운받고 복잡한 결제과정을 거친 뒤 시청을 해야 하는 불편한 시절이었다.
이에 TV 모니터 기사는 각광받았고, 트래픽(조회수)을 올려주는 효자상품이었다. TV 모니터 기사 속엔 그 날 방송된 드라마의 줄거리는 물론 주연 배우들의 대사, 키스신 김치싸다구 등 명장면(?)이 생생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TV모니터 기사엔 예능프로그램 게스트로 누가 나왔는지, MC와 게스트의 케미는 어떠했는지, 게스트가 소위 어떤 ‘드립’을 했는지도 소상히 적혀있다.
굳이 TV를 보지 않아도 기사 클릭 한 번만으로 그 날의 방송을 다 파악할 수 있는, 시청자들을 위한 연예매체들의 맞춤 서비스.
하지만 이 맞춤 서비스 뒤엔 연예 기자들의 과도한 노동과 눈물이 숨겨져 있다. 평일 밤 밤 10시대에 드라마가 방송되고 뒤를 이어 밤 11시대에 예능이 방송된다. 모니터 담당 기자들은 당연히 이 시간에 일을 해야 한다. 아니, 실시간 기사 전송을 위해서 밤 9시대부터는 TV를 켠 채 노트북 앞에 앉아야 하고, 예능이 끝나는 오전 12시 40분쯤 마지막 기사를 작성해 전송하면 훌쩍 새벽 1시를 넘긴다.
그렇다고 방송 도중 휴식을 취해가며 일을 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대사 하나, 말 토시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타이핑을 해야 하고, 글로 TV 장면을 보여줘야 하는 만큼 생생한 묘사도 곁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드라마 대사나 예능 애드리브를 놓쳤는데, 타 매체에서는 보도를 해 재미를 볼 경우 어김없이 데스크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이에 기자들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아울러, TV 모니터 담당 기자는 기사만 잘 써서도 안 된다. TV화면 캡처도 모니터 담당 기자의 필수 덕목이다. 자료사진이나 제작발표회 사진으로는 그 날 방송의 생생함을 전달할 수 없기에 기자들은 대사를 받아 적고 그 대사를 기사로 가공하는 동시에 TV 화면 캡처도 해야 한다.
물론, 방송사의 사전 동의 없이 행하는 이 화면 캡처는 불법이다. 하지만, 방송사에서는 자사 프로그램 홍보효과를 누리니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특히 불법 캡처를 문제 삼았다 해당 매체와 트러블이 생기고, 향후 부정적인 기사가 쏟아지는 게 두려워서 모른 척 하기도 한다.
드라마가 끝나고 예능 시작하기 전 광고 시간에 잠시 쉬면되지 않느냐고? 드라마가 끝나면 대사 위주로 부분 부분 썼던 기사들을 묶어 그 회차의 종합 기사를 송고해야 하고, 아울러 예고편도 기사화 하면서 다음 날 방송에 대한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조회 수도 올려야 한다. 특히 다음 날 아침 타사 모니터 기사보다 전송 시간이 늦어 포털 메인섹션을 장식하지 못하면 데스크의 불호령이 떨어지기 때문에 기자들은 ‘좀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 막간의 휴식마저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TV모니터 기사는 누가 얼마나 쓸까? 각 매체는 모니터 당번을 정해 평일 밤과 주말에 투입한다. 물론 평일 밤 모니터 당번을 한다고 해서 일찍 퇴근하지는 않는다. 야간 현장 취재나 행사 투입을 면제받고, 다음 날 오전 9시보다 조금 더 늦게 출근할 수 있는 ‘특혜’가 주어지는 정도다.
아울러, 이 모니터 기사생산은 대부분 막내급 기자들이 한다. 종합일간지에서 사회부 경찰서 출입 기자부터 시키듯 하드트레이닝에 좋다는 명목으로 막내급 기자들이 TV 모니터 기사에 대거 투입된다.
물론, 그들만의 명분은 있다. 기사 작성, 화면 캡처, 기사 전송을 동시에 함으로서 순발력을 기르고, 실시간 TV 시청을 통해 요즘 드라마 예능 트렌드를 파악하기에 좋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기자는 9 to 6로 일하는 회사원이 아니라 기사거리가 되면 새벽이든 심야든 언제든지 일할 수 있는 직업임을 인식시켜주기에도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TV모니터 기사에 막내급이 대거 투입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궂은일이기 때문이다. 연차가 쌓이며 연예 매체 물정을 뻔히 아는 기자들에게 TV모니터 기사작성을 시키면 그만둔다고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취업난을 뚫고 이제 막 연예 언론계에 첫 발을 디딘 의욕 충만한 기자에게 시키는 것이다. 사실상 미생들을 향한 또 하나의 열정페이다. 물론, 야근 수당을 제대로 지급하는 매체들도 있지만, 경영난에 시달려 야근 수당을 동결, 혹은 축소시키거나 아예 연봉계약 시 근무조건에 야간 TV 모니터를 넣는 매체도 있다.
한편, 최근 TV 모니터 기사는 기로에 서게 됐다. 방송사가 국내 주요 포털 사이트에 하이라이트, 주요장면, 예고편 영상을 게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포털 역시 앞 다퉈 별도 섹션까지 만들며 해당 영상들을 노출시키고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다. 움직이는 장면을 글로 풀어내는 것도 한계가 있다. 직접 영상을 보는 것만 못하다는 이야기다. 이와 때를 같이해 유튜브 등 영상콘텐츠가 대세로 떠올랐다. 특히 화려한 볼거리가 많은 연예콘텐츠 분야에서는 영상이 텍스트를 압도한 지 오래다.
하지만 연예매체들은 이 의미 없는 심야노동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뉴 미디어 시대의 선두주자를 자임하는 연예 매체 데스크들은 이런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거나 둔감하다. 혹은 모니터 기사 무용론에 대해선 공감하지만 ‘타 매체가 먼저 하면 우리도 한다. 먼저 총대를 메거나 먼저 손해보는 짓은 하지 않겠다’는 생각 지배적이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연예기자들은 1년 중 가장 불행한 때가 시상식이 몰려있는 연말이라고 한다. 각종 영화제를 필두로 가요시상식 연예대상 연기대상이 몰려있는 연말엔 연일 밤샘근무다. 그래서 연예 기자들의 소원은 보신각 타종 구경과 해돋이 여행이다. 타종을 지켜보며 연기대상 수상자 발표 소식을 타이핑하는 그들의 손끝에 진정한 새해는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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