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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T Apr 25. 2019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X년

세련된 랜선 친구보다 사람 냄새나는 아날로그 관계가 그리운 건 왜일까

영화 '건축학개론'을 통해 첫 사랑의 아이콘으로 등극한 수지. SNS가 주도하는 인간관계망이 넓어질수록 아날로그식 커뮤니케이션이 그립다(사진출처: '건축학개론' 스틸컷)


“커피 한 잔 타 줄게. 둘 둘 둘이면 되지?”



책을 출간하고(참조: 퇴근할까 퇴사할까/ 출처: 브런치 책방) 한 지인 분을 만났다. 직접 책을 사신 것도 모자라 축하 기념 식사를 하자고 자신의 사무실로 부른 자리였다. 세계적인 커피 전문점이 지척에 깔려 있고, 집이나 사무실에서도 질 좋은 원두를 바로 내린 신선한 커피를 마시는 시대. 믹스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마당에 믹스커피나 자판기 커피도 아닌 커피, 설탕, 분말크림을 따로 구비해놓고 일일이 수저로 덜어서 커피를 타 마시는 지인의 취향이 참 신선하게 다가왔다.



‘쌍팔년도’엔 저렇게 3종 세트를 다 갖춰놓고 커피를 타 마시는 것도 트렌드 세터들의 문화였겠지. 하지만 세월이 흘러 거의 잊혀져가는 유물이 되었고, 그런 만큼 지인이 타주는 둘 둘 둘 황금 비율의 ‘다방 커피’는 참 정겨웠다.



아날로그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는 이 지인은 놀랍게도(?) SNS를 통해 내 출간 소식을 접하고 연락을 해왔다. 다방 커피와 SNS,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녀석과 동거 중인 지인은 그 의아함을 이내 풀어주었다.



난 말야, SNS 가입해서 지인들과 친구는 맺어놓았지만 내 이야기를 업로드하진 않아. 내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땐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듣고,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하지. 다만, 사람들의 관계망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그것도 SNS으로 옮겨왔기 때문에 아날로그 시절부터 이어 온 인연의 끈을 놓지 않으려면 SNS 가입을 하지 않을 수 없었어. 거스를 수 없는 대세에 내가 굴복한거지



그렇다. 우리는 온라인 모바일이 주도하는 새 질서 아래 살고 있다. 과거 손 편지로, 전화로, 삐삐로 건네던 안부와 이런저런 이야기들은 SNS ‘좋아요’로 댓글로 대신하고 있다. 실제로 퇴사 소식을 전하고 제 2의 인생을 시작했을 때, 출간 소식을 알렸을 때 많은 이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좋아요’를 눌렀고 격려와 응원의 댓글을 많이 달았다.



SNS 인간관계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사는 게 바빠서, 혹은 시간이 나지 않아 직접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주고받지 못할 때 SNS는 굉장히 효율적인 수단이다. 친구 지인의 근황을 손바닥 안에서 실시간으로 볼 수 있고, 시공간을 뛰어넘어 기쁜 일이 있을 때는 축하를, 힘든 일이 있을 때는 위로를 건넬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모르고 지나칠 뻔 한 지인의 생일도 SNS는 친절하게 알려준다.



하지만, SNS에서만 안부를 주고받는 사람을 과연 ‘지인’이라고 할 수 있을 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아예 아무런 인사도 건네지 않는 것보다 그래도 SNS에서라도 인사를 건네는 게 좋은 것 아니냐, 랜선 위에서라도 널 생각해주는 게 어디냐, 배부른 소리하지 말라고 일갈할 수도 있겠다. 나 역시도 특정 지인은 전혀 만나지 않고 SNS로만 인사를 건네니 할 말은 없다.



그런데 가끔이라도 면대 면으로 만나 서로의 눈빛과 체온과 마음을 교환하거나, 따뜻한 밥 한 끼, 술 잔 한 번 기울이지 않은 채 SNS에서만 소통하는 건 마치 사이버 인간과 소통하는 느낌이 든다.



무엇을 바라서가 아니다. 내 책을 사주고 밥을 사달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직접 만나야지만 느낄 수 있는 사람냄새가 아쉽고 그립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기술의 발전하고 사회가 진보한다고 해도 사람냄새까지 랜선에 와이파이에 태울 수는 없다. 온라인이 주도하는 질서 아래 아날로그식 인간관계가 해체되고, 그 관계들이 새롭게 재편된다고 해도 ‘사람 냄새’가 나야 한다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래서일까. 가끔은 좋아하던 사람에게서 온 삐삐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해 공중전화 앞에 줄을 섰던 그 설렘이 그립다. SNS로 소개팅 상대를 미리 예습할 수 있는 지금이 아닌, 소개팅 자리에 누가 나올 지 몰라 두근두근하던 그 시절이 그립다. 내 사용패턴을 분석해 맞춤형 영상을 소개해주는 유튜브 대신, 무슨 노래가 나올까 기대하면서 라디오를 듣다 마음에 드는 노래가 나왔을 때 누르던 녹음 버튼이 그립다.



물론, 풋풋한 청춘의 내 가슴을 뛰게 한 그녀들(주: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그런 존재에 대해 납득이는 ‘X년(Ssyang Nyeon)’이라고 했다)의 모습을, 청춘이라는 공통분모를 함께 했던 친구들, 지인들을 SNS을 통해 얼마든지 볼 수 있다. 하지만 SNS 속 그들은 계정명만 그대로일 뿐 누구의 아내이자 엄마, 아빠다. SNS 속 아이들의 사진만 한 가득인 누구의 엄마가 아닌 X년 그대로의 모습이 보고 싶다. 쓸쓸한 뒷모습의 샐러리맨이 아닌 그 시절 그 고민을 나누던 친구가 보고 싶다.



그 시절 X년이 그리운 건 단지 첫 사랑 때문만은 아니리라. X년 이라는 단어 안에는 그녀를 좋아했던 한 없이 순수하고 맑았던 내 자신이 있었고, 까칠 도도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 여린 그녀가 있었고, 얼굴 맞대고 술잔 기울여가며 이런 고민을 나누던 친구가 있었고, 사람냄새 나는 우리 모두의 청춘이 있었기 때문이다.



SNS를 통해 즉각적으로 이들을 위로하고, 반가운 인사를 건넬 수 있다. 하지만 그 시절의 그들은 없다. 나도 변했다. 그래서 실시간으로 지인의 모든 궁금증을 해소시켜주는 편리한 SNS보다 차라리 느리고 기다리게 하더라도 설렘을 주는 모지리같은 아날로그 소통 수단이 그립다.



갈라진 마음이 다시 촉촉해질 수 있는 차를 타서 마셔야겠다. 추억 두 스푼에 따뜻함 두 스푼, 설렘 두 스푼 넣어 둘 둘 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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