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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T Jul 12. 2020

실패는 ‘광화문 글판’을 닮았다

실패라는 우연은 인연이라는 기회로 이어졌고 운명이 됐다

오장환 '종이비행기'(2018년 가을 광화문 글판, 출처: 교보생명 홈페이지 캡처)

“김 팀장, 조만간 ㅇㅇ부(회사 내 대표 한직 부서)에서 일하게 될거야. 곧 조직개편도 단행되고 인사명령도 날 거고”     


머릿 속이 하얘졌다. 회사 구성원으로서의 사형선고이자 이제 그만 나가는 게 어떻겠냐는 무언의 압박이었기 때문이다. 내 인생 최대의 실패 경험이었다.       


사실, 잘 다니고 있던 회사가 있었는데 괜시리 정에 이끌려 좋은 이직 기회를 놓치는 것 같았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회사 문화나 비전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팀장이라는 자리, 이전 회사보다 높은 급여라는 조건을 보고 이직한 게 그만 화근이 되었다. 이직을 하자마자 비로소 회사의 치명적인 단점들이 들어왔다. 스티브잡스를 존경한다는 총수는 누구보다 보고서와 각종 서류를 좋아했으며 회의 중독자였다. 하지만 임원들은 스티브잡스의 행보와 정반대로 행동하는 총수에게 아부했고, 총수는 그런 임원들을 총애했다.


때문에 총수에게 잘 보이고 싶은 임원들의 독촉으로 거의 매 주 ‘천하제일 PPT 경연대회’가 열렸다. 내용보다는 글자크기와 줄 간격 등 허레허식이 중요했고, ‘심플하면서도 꽉 찬 느낌이 나는 보고서’를 만들라는 닥달을 연일 받으면서 ‘왜 내가 이걸 해야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고서에 대한 인신공격성 지적이 거듭되면서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또 본부회의 부서회의 선임회의 등 각종 회의도 모자라 '회의문화 개선을 위한 회의’까지 열리는 상황에 회의가 들었다.  


그러던 중 몸 담고 있던 팀이 해체되고 나와 팀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팀장으로서 팀이 해체되는 걸 지켜보고 있으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에 자괴감이 들었고, 팀을 지키지 못해 팀원들에게 미안했다. 때마침 한직발령까지 났다. 청춘을 바쳐 헌신한 사람을 헌신짝처럼 내던지는 회사에 화가 났고, 그 상황을 이겨내지 못한 내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이대로 회사를 다니지도 그만두지도 못한 채 고민만 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아까웠다. 결국 퇴사를 결심했다.      


먼저 퇴사하고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선배와 술잔을 기울였다. 조언을 구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마음 속엔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회사에서 살아남지 못한 자책감으로 가득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우연히도 시내 대형서점의 명물 ‘광화문 글판’이 눈에 들어왔다. 오장환 시인의 ‘종이비행기’라는 시였는데, 간판의 글귀들을 보고 그 자리에 몇 분간 멍하니 서있었다. 마치 하늘에 있는 신이 내게 내려보내는 위로의 말 같았기 때문이다.     


“못쓰는 종이로 비행기를 접는다. 비행기는 푸릉푸릉 날아갈테지. 하늘나라 별애기를 태우고 올 테지”(2018년 가을, 광화문 글판)     


20대 중반부터 40대 초반까지 16년 동안 한 우물을 팠지만, 한창 일할 나이에 쫓기듯 등떠밀려 회사를 떠난 내게 실패의 모습은 ‘단물 빠진 껌’이었다. 실패의 뜻은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우연히 눈에 들어온 광화문 글판은 오랜 인연처럼 느껴졌다. 죽마고우가 해주는 따뜻한 격려같았다. 이 글판은 실패에 대한 의미를 바꿨고 내 삶을 바꿨다. 쓸모 없을 것 같은 종이도 쓰임새에 따라 아름다운 꿈을 전하는 비행기가 되듯, 실패라고 생각했던 지난 삶을 긍정적으로 돌아보고 그 속에서 앞날에 대한 희망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실패라는 단어는 그렇게 새로운 시작이라는 뜻을 숨기고 있었다.     




정현종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2019년 봄 광화문 글판, 출처: 교보생명 홈페이지 캡처)


무엇을 할까 고민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일과 잘 할 수 있는 일을 떠올리고 둘 사이의 간극을 좁혀나갔다. 남는 건 글이었다. 소박하지만 따뜻한 온기를 전할 수 있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글쓰기 모임에도 나갔고,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옴니버스 에세이 출간을 제안하고 직접 기획도 했다. 그렇게 4명이 모였다.     


직장인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는 만큼, ‘퇴사’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4인 4색 직장인들의 다양한 고민을 담은 첫 에세이 ‘퇴근할까 퇴사할까’를 출간했다. 이후 작가의 자격으로 시내 서점을 찾았다. 갑자기 광화문 글판과 마주한 그 날이 생각났다. 퇴사 후 한기서린 마음으로 오들오들 떨던 내가 아니라, 희망을 가득 품은 봄내음 같은 사람이 되어 당당히 글판 앞에 섰다. 글판은 어느덧 정현종 시인의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2019년 봄, 광화문 글판)     


우연으로 시작한 광화문 글판과 나와의 인연. 바뀐 글판 역시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어떤 역경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말고 다시 튀어오르는 공처럼 유연하게 살자는 메시지는 인연을 넘어 운명같이 느껴졌다.

     

난 글을 쓰면서 사람들과 교감하고 있다. 글을 통해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했고, 자존감을 되찾았으며, 하고 싶은 일과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았다. 그래서 이젠 글을 통해 누군가에게 따뜻한 위로와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고자 고민하고 있다. 


앞으로 나는 즐겁고 신나는 이야기가 있는 날, 아니면 우울하고 기분이 안 좋을 날, 내가 너무 한심해 보이는 날, 아무도 나를 이해해 주지 않는 것 같은 날, 비 오는 길을 걷고 싶은 날, 하늘이 맑고 예쁜 날,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들이 신비로워 보이는 날 글을 쓸 것이고 그 때마다 내 마음의 심장 박동도 더 강하게 뛸 것이다.       


시내에 나갈 일이 있어 이동하던 중 잠시 짬을 내 광화문 글판을 다시 찾았다. 그곳엔 백무산 시인의 ‘정지의 힘’이 적혀있었다.     


멈춰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꽃을 피우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씨앗처럼 누구에게나 도약을 위한 멈춤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글귀였다. 내가 작가가 되기 위해 회사생활 실패와 퇴사라는 멈춤의 시간을 가졌듯, 코로나 19로 인해 일상의 많은 것들이 정지된 지금도 환하게 빛날 훗날을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 되리라 믿는다. 다시 고개를 들어 광화문 글판을 바라본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2020년 여름, 광화문 글판)  


Copyright(C) Jul.2020 by Writer T. All rights reserved.   



백무산 '정지의 힘'(2020년 여름 광화문 글판, 출처: 교보생명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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