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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T Aug 21. 2020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갓길 걷기’

옆으로 비켜서니 세상이, 그리고 인생이 보이기 시작했다

#. 걷기는 걷(어내)기다          

‘걷기’          


등 떠밀리듯 회사를 나온 후 하얘진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하얀 백지에 두 글자를 아로새겼다. 좌절과 방황을 끝내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하나 둘씩 정했는데, 리스트 가장 위쪽에 걷기가 있었다. 새벽 한두 시까지 이어지는 야근으로 인해 밤참은 필수였고 앉아서 일만 하다 보니 뱃살은 늘어만 갔다. 몸무게는 많이 불었고 스트레스까지 겹쳐 심장에 이상이 느껴질 정도였다. 건강도 회복하고 잃어버린 자존감도 되찾기 위해 난 걷기를 택했다.         

 

조금만 먹어도 살이 찌는 체질이라 학창시절부터 걷기와 나는 동반자였다. 걷기는 가장 쉬운 다이어트 방법이었고, 살을 빼고 균형잡힌 몸을 만든 뒤에는 친구들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걷기 전도사가 되어 효과적인 걷기 방법에 대해 설명할 때면 사람들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나를 주시했다. 걷기는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행동이었고, 스스로와의 약속을 잘 지켜나가며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나는 소중하다’는 자존감을 얻는 동력이었다.      


특히 걷는 동안엔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 자연과 주변 일상의 변화를 직접 체감할 수 있어서 좋다. 얼음이 걷히고 냉기가 가신 땅 위로 수줍게 싹을 틔우는 새싹들, 따뜻한 날씨와 어우리지는 향긋한 꽃내음, 푸른 나뭇잎들 사이로 기분 좋은 따가움을 주는 여름 햇살, 파란 가을 하늘을 캔버스 삼아 울긋불긋 낙엽들이 그려놓은 실사판 수채화, 차갑지만 그 속에 청량함을 숨겨놓은 겨울 바람과 뽀드득 소리를 덤으로 주는 하얀 눈까지 걷는 동안엔 모두 내 것이 된다.          


또, 걸으면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세상살이를 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기도 하고 작가로서 글의 영감을 얻기도 한다. 무엇보다 목표지점에 다다를 때의 성취감도 크다. 가쁜 숨을 몰아 쉬기도 하고, 무더위에 땀이 줄줄 흐르거나 아니면 너무 추워서 코가 빨개질 때도 있지만 목적지에서 한 숨 돌리며 즐기는 경치는 나만의 작은 천국이다.          


무엇보다 걷는 동안엔 엉켜있던 생각들이 정리된다. 책상 앞에서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거나 잠자리에서 뒤척였지만 얻지 못했던 해답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기도 하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과 장단기적인 목표들도 생긴다. 좋지 않은 기억, 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던 나쁜 생각들도 길바닥에 버리고 온다. 

        

한 마디로 걷기는 걷기다. 걸으면서 좋지 않았던 일들을 걷어내는 행위다.   

       

그렇다고 무작정 걷지는 않는다. 출발지와 목적지를 정해놓고 이동 거리도 대략적으로 계산한다. 지루하지 않게 걷기 위해 매일 다르게 노선을 짜기도 하고, 평소 가고 싶었지만 기회가 되지 않아 가보지 못한 곳을 목적지로 삼기도 한다. 선호하는 코스는 교통량이 적어 매연이 심하지 않은 곳, 목적지에 도착해서 전망을 조망할 수 있는 곳, 혹은 강이나 호수 등 멋진 경치가 펼쳐지는 곳 등이다.       

  

#. 갓길은 GOD길          

그렇게 목적지를 향해 걷다보면 반드시 접하게 되는 길이 있다. 갓길이다. 갓길은 인도와 붙어있는 도로 맨 가장자리 길로, 걸을 때면 언제나 갓길과 어깨동무를 하는 기분이 든다. 인도가 없는 길에서는 인도 역할까지 해준다. 갓길은 또 구급차 소방차 등 긴급 차량이 지나가는 통로이자 고장난 차량을 임시로 세워 놓는 용도로, 접촉사고 시 교통흐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차를 빼는 장소로도 사용되며, 졸음이 쏟아질 때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도 사용된다.     


다양한 쓰임새를 지닌 갓길. 하지만 정작 운전할 때는 전방을 주시하느라 갓길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인생길 주행도 마찬가지다. 갓길에 차를 대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니, 갓길로 빠지면 레이스에서 낙오한 사람, 인생 패배자라는 낙인에 잠시라도 갓길에 차를 대려는 사람은 없다.    

      

학창시절부터 무한 경쟁으로 내모는 우리네 인생길에서 차를 갓길에 대는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수능시험 명문대 진학 취업 등으로 고단한 학생들도, 매일 매일 전쟁과도 같은 직장생활을 감내하느라 피로에 찌든 직장인들도 쏟아지는 졸음을 참고 인생길을 내달린다.      

    

그렇게 인생길을 주행하다 사고가 나서 피를 흘리는 사람들도 차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라 제대로 속도를 낼 수 없는 사람들도 절대 갓길로 빠지지 않는다. 우리 사회도 ‘나 때는 말이야, 지금보다 더 힘든 여건인데도 쭉쭉 직진했어’라고 훈계하고, ‘사고 나니까 청춘이다’ 같은 위로 아닌 위로의 말로 레이스 이탈을 막아선다.


나 역시 45년의 인생 주행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갓길에 차를 댄 적도 없고 갓길을 제대로 본 적도 없다. 45년 무사고 운전이었지만 직장인의 무게, 가장의 무게에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졌다. 때마침 몸담고 있던 회사 내 조직은 사라졌고 한직으로 인사발령이 났다. 이 상태로 주행하면 대형사고가 날 것만 같아 어쩔 수 없이 사표라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제 2의 인생 시작이라는 깜빡이를 넣고 갓길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그렇게 퍼지기 일보직전인 차에서 내려 걸으니 비로소 갓길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실 차선을 이탈하는 행위엔 큰 용기가 필요했다. 핸들을 꺾어본 적도 브레이크를 밟아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가 갓길에 차를 대고 있는 동안 다른 차들이 나를 앞질러 쌩쌩 달릴까봐 겁이 났다. 나랑 비슷한 속도로 달리던 사람들로부터 멀어질까 두려웠다.      

     

그런데 옆길로 빠져보니 그제서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갓길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빠르게 달리느라, 남들에게 추월당할까봐 앞만 보고 달린 내게 갓길의 세상은 경이롭게 다가왔다. 주행 시엔 바로 앞의 차들만 보였지만 갓길에서는 굽이굽이 뻗어있는 인생길의 모양과 방향을 조망할 수 있었다.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갓길에 서니 비로소 어느 방향으로 얼마만큼 가야할 지, 어느 정도 속도를 내야할 지 계산이 섰다.    

    

고로, 갓길은 God길이다. 앞만 볼 수 있는 길이 아니라 신(God)이 위에서 내려다보듯 내 인생의 전체적인 방향을 조망할 수 있는 길이다.      


내겐 그동안 인생길을 걸으며 생긴 연륜이라는 탄탄한 근육과 삶의 지혜라는 나침반이 있다. 더디고 때로는 방향을 잘못 들어설 수 있지만 여전히 난 걸을 수 있고 안 좋은 생각들을 걷어낼 수 있다. 힘들면 갓길에 서서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가야할 길을 미리 둘러볼 수 있다. 그렇기에 운동, 취미를 넘어 내 인생 항로의 다음 목표도 걷기, 그리고 갓길에 멈춰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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