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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T May 03. 2018

언어의 순서

내가 주체가 되는 말을 위하여...



“나는 쓸 것이다 글을 바쁠 때나 여유로울 때나 기분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일상생활 속에서”
 

문장 파괴자냐고? 아니다. 나름의 깨달음(?)이 있어서다.

 
3월, 작심 3개월의 신음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연초 3대 계획인 금연, 다이어트, 자기개발(특히 어학) 계획이 무너지는 시기다. 대게 무너지는 건 금연 다이어트 어학 순인데, 금연과 다이어트가 어느 정도 본인의 의지에 의해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면, 어학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다른 계획들에 비해 가장 늦게 무너지지만 낙담은 더 큰 것 같다.
 

왜 그럴까? 어학 공부 중에서도 특히 영어와 중국어 공부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데, 이 두 언어 모두 우리말과 어순이 다르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그리고 그 공통점은 가장 큰 장애물로 다가오는 것 같다. 
 

외국에서 자랐거나 장기간 외국에 체류하면서 언어가 몸에 벤 경우는 자연스럽겠지만,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머릿속에서 문장을 재조립하고 그 문장에 맞는 영어 단어를 끼워 넣을 것이다. 아니면 영어 단어로 먼저 바꿔놓은 뒤 그걸 문장으로 조립하기도 한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말들이 족족 입을 통해 빠져나와야 하거늘, 머릿속에서만 맴돌며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말의 변비’에 걸린 셈이다. 차라리 위의 저 문장처럼 서양식(?) 언어습관을 들이면 외국어를 훨씬 더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하며 이내 피식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 끝자락엔 뭔지 모를 묘한 여운이 남았다. 외국어에 대한 단순한 동경 때문이 아니라 그 괴팍한 문장 속에서 보이지 않는 힘을 느꼈기 때문이다.
 

영어를 비롯한 서양권 언어, 그리고 중국어에서는 주어 다음에 동사가 온다. 이야기하는 주체의 행동에 방점이 찍힌다. 예를 들어, ‘친구와 저녁을 먹었다’는 걸 표현할 때 “나는 먹었다 저녁을 친한 친구들과 시내 중심가의 레스토랑에서”라는 식으로 말을 한다. 어디서 누구와 함께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는 부차적인 문제고, ‘내가 먹었다’는 게 가장 핵심적인 포인트다.



반면, 우리말에서는 동사가 맨 나중에 온다. 이야기 주체의 행동인데도 가장 부차적인 말이 된다. 누구를 만나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한 후 자신의 행동을 밝힌다. 그렇게 “난 어제 친한 친구들과 시내 중심가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었어”라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문장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굳이 학창시절에 배웠던 S+V+O가 어떻고, 언어구조학적으로 한국어와 외국어의 차이가 어떻고 어렵고 복잡하게 이야기하고 싶진 않다. 다만, 외국어는 화자 중심, 우리말은 청자 중심이라고 요약하면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일까,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서양 사람들은 좋고 싫은 감정을 그대로,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반면,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이나 기분 상태를 에둘러 표현하는 게 겸양이자 미덕으로 알고 있다. 한국 사람들이 서양사람들의 돌직구 화법을 구사하면 “예의 없다”는 말을 듣는다. 우연의 일치하고 하기엔, 어순이 미치는 영향이 큰 것 같다.
 

그런데, 내 말의 주인공은 나였으면 좋겠다. 이야기 끝에 나는 사라지고 배경만 남는 언어보다 내가 중심이 되고, 화자인 나와 청자의 관계가 분명해지고 공고해지는 언어를 남기고 싶다. 에둘러 표현해서 상대방과 스무 고개를 하고 싶지도 않다. 있는 그대로의 진심을 전해주고 싶고, 듣고 싶다.
 


그래야 내 말이 내 행동을 이끌고, 내 행동 하나에도 좀 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말의 가장 좋은 예가 바로 언어의 순서가 아닐까? 어순을 다 비틀어서 외계어 같은 말을 할 수는 없겠지만, 머릿속으로는 미사여구를 동원한 수식어보다 내가 주체가 되는 동사를 찾을 것이다. 그게 최고의 외국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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