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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T May 03. 2018

불금의 브금(BGM)

너무 늦어버린  그 말... '미안하다'


인생의 무게를 잔뜩 짊어졌지만 울 수 없는 어느 집의 가장들이 소주잔에 눈물을 담아 잔을 털어낸다. 또 다른 남녀 한 쌍은 당장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는지 길거리를 침대 삼아 농도 짙은 체온을 나눈다. 길 건너 친구로 보이는 몇 명의 남자 무리는 뭐가 그리 즐거운 지 얼큰해진 얼굴로 담배 연기는 하늘 위로, 가래침은 땅바닥으로 내뿜으며 담소를 나눈다. 그리고 그 옆을 런 웨이 삼아 팔짱을 낀 채 걷는 일군의 패셔니스타 언니들이 시선을 끈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기다리는 시간, 일주일 간의 업무 스트레스와 보기 싫은 얼굴들을 뒤로 하고 느끼는 2박 3일간 짧은 자유의 시작점, 사람들은 이를 ‘불금’이라 부른다. 그 날 나는 ‘불금’이란 말과 어울리지 않게 지인과 미래에 대해 이런저런 걱정과 고민을 털어놓고 서로를 위로한 채 집으로 향했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나왔을 뿐인데 바깥 세상은 이미 이른 저녁부터 ‘욕망의 분출구’가 되어 있었다.
 

‘불금’의 경쾌함과 유쾌함을 마냥 즐길 수 없었던 나는 이 거리의 이방인이었다. 그래서 알코올과 니코틴 소독을 마치고 길거리로 쏟아져 나온 욕망분출러들을 피해 뒷골목 우회로를 택했다. 그렇게 인적 드문 골목길을 걷다 그만 그 자리에서 화석처럼 굳어버렸다. 뒷골목의 브금(BGM), 불금의 브금이 울려 퍼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 It´s sad, so sad. sad situation~’
 


요즘은 찾아보기도 힘들고, 그래서 단어마저 생소한 ‘레코드 가게’에서 흘러나온 Elton John의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 욕망 분출과 배설로 넘쳐나는 메인 스트리트의 화려함과는 전혀 다른 뒷골목의 쓸쓸한 풍경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노래, 욕망분출러들의 스마트폰에서 나오는 세련되고 매끈한 멜로디와는 동떨어진 탁탁 ‘레코드 판 튀는’ 소리마저 나는 ‘구닥다리’ 노래, 하지만 마치 지금 내 마음을 읽고 불러주는 듯한 노래… 이 노래 때문에 나는 가던 길을 멈췄다. 이 노래는 생경한 불금의 풍경을 연출한 것으로도 모자라 나를 23년 전 스무 살로 되돌아가게 만든 타임머신이었다.
 

새하얀 인생 도화지에 이제 막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스무 살 우리들을 두고 어른들은 ‘꿈 많은 청춘’, ‘인생에서 제일 빛나는 시기’라고 했다. 대학입시 낙방으로 ‘재수’라는 인생 최초의 쓴 맛을 본 우리들은 공감하지 않았지만.
 

그 눈부시게 아름답던 새하얀 시절, Elton John을 좋아하던 단짝 친구가 있었다. 그 아이는 ‘워크맨’으로 항상 영화 ‘Lion King’의 주제곡 ‘Can you feel the love tonight’를 들으며 재수 생활의 고단함을 이겨 나가던 친구였다. 족집게 강의를 함께 듣기로 약속하고도, 밥을 같이 먹기로 해놓고도 매 번 지각해서 뭐라고 하려는 찰나 헐레벌떡 들어와서 “미안해, 친구야. 내가 많이 늦었지?”라고 선수 쳐서 화도 못 내게 하던 속 없는 친구이기도 했다.
 

나와 그 친구는 이런저런 얘기들을 많이 주고 받았다. 그 수많은 얘기들 중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말이 있다. 야간 자습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길, 아무 말 없이 봄바람을 맞고 걷던 그 친구는 “우리의 인생 길 끝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한 번 가봤으면 좋겠다”고 제법 어른스러운 말을 했다. 그 땐 피식 웃고 넘겼지만 그게 그 친구의 미래를 암시할 줄은 몰랐다.
 

그렇게 그 녀석은 며칠 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세상과 작별했다. 죽음이라는 단어와 아주아주 거리가 멀 것 같은 그 나이 또래의 장례식은 큰 충격이었다. 그 때도 요즘처럼 ‘추운 봄 날’이 이어졌는데, 그 친구 부모님은 어린 시절 가족들이 자주 놀러갔다던 한 호숫가에 그 친구를 뿌려주었다. 
 

당시엔 녀석 부모님께 가끔 안부 전화도 드리곤 했었는데, 어느 순간 멈췄다. 내 목소리는 곧 가슴 속에 묻은 아들을 소환하는 잔인한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연락은 뜸해졌고, 나 역시 세상 살이라는 풍랑을 만나면서 어느 순간부터 그 친구의 존재를 까맣게 잊었다. 그런데 그 음악이, 뒷골목의 그 음악이 잊고 있던 옛 기억을 끄집어냈다. 연인의 이별을 담은 노래 가사의 배경과는 달랐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말’이라는 가사는 뇌리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노래가 끝나자 타임머신은 날 다시 현재로 데려다 주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아직 그 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한동안 잊고 지낸 그 친구에게 미안했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미안했다. 무엇보다 내 자신에게도 많이 미안했다. 난 뭐가 두려워서, 뭐가 그리 잘나서 스스로에게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를 아끼고 살았을까? 타임머신을 타기 직전 지인과 나눴던 불금의 대화들이 오버랩 됐다
 

그 날 불금의 브금은 많은 것을 바꿔놓을 것 같다. 인생길을 주행하면서 바쁠수록 급할수록 엑셀레이터를 더 밟았지만, 이젠 브레이크를 밟으려 한다. 중간중간 사이드미러도 체크해서 주위도 살피려 한다. 무엇보다 운전을 하면서 ‘미안하다’는 말도 자주 할 것이고, 주위 사람이 내게 미안하다고 할 때 ‘세상에서 가장 힘든 말’을 한 만큼 가급적 흔쾌히 받아들일 것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도 정했다. 언젠가부터 겨울이란 놈은 가을과의 경계를 허물며 빨리 찾아오고, 그것도 모자라 봄과의 경계도 허물며 물러날 생각을 안 한다. 그렇기에 요즘처럼 찬 바람이 부는 봄 날엔 그 녀석이 이리저리 휩쓸려 다닐 것 같아 마음이 아린다. 찬 바람이 이리저리 끌고 다니기 전에 그 녀석이 있는 호숫가에 다녀올 것이다. ‘워크맨’은 없지만 스마트폰에 Elton John 노래들을 몇 곡 넣고서 말이다. 그리고 그동안 하지 못했던, 하기 힘들어서 애써 잊어버렸던 그 말을, 친구가 생전 내게 자주 했던 그 말을 꺼내 보려 한다.
 

“미안해, 친구야. 내가 많이 늦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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