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대함의 비루함
나는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40대 중반의 아줌마다. 아니 초반이다. 아니, 중반이던가, 후반이던가...? 최근 들어 내 나이를 셈해 본 기억이 없는지라 내게 나이는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새삼스레 내 나이를 궁금해하는 사람도 없다. 얼추 나이 좀 먹은 아줌마겠지 싶겠지. 그러게. 나이가 뭐가 대수라고?!
아니, 그런데 나이는 대수였다. (오락가락한다) 문제는 바로 내가 40줄이 넘어 늦게 공부를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또다시 공부를 이어가겠다고 선언을 했다는 것이다. 이 나이 들어 또 공부라니.... 한참 돈을 벌어야 할 때 공부를 하겠다니 망령이 든 게 분명했다. 그것도 언제 끝날지도 모를 공부를…! 가슴에 무거운 돌 하나가 얹어졌다.
남들보다 10년씩 늦게 꿈을 좇는다고 우스갯소리를 늘어놓았는데 이제는 20년이 늦어졌다. 해맑은 얼굴로 '언니'라고 불러도 되냐는 대학원 동기에게 '음... 엄마라고 불러도 돼'라고 혼자 중얼거리는 건 익숙한 일상이 된 지 오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런 얼토당토않은 결정을 내린 나를 말리는 주변인들은 없었다. ‘그래?! 그럼 기꺼이 나의 업보를 받아들이겠어!’
그런데 문제는 어쩌다 마주친 사람들이다.
원대한 꿈을 꾸지는 마.
이들의 말을 해석하자면 이렇다.
이미 너무 늦었잖아. 그러니 뭔가 대단한 걸 하려고 하지 마. 어차피 이미 늙어버린 너를 세상은 알아주지 않으니까. 그러니 꿈꾸지 마. 더군다나 그 꿈이 크다면 말이야.
이 말을 하신 분을 원망할 생각은 없다. 흔한 꼰대의 '걱정을 가장한 가격 후려치기'라고 생각하고 그냥 흘려버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런 말을 들었던 적이 한두 번은 아닌 듯하다. 30대 중반에 처음 일을 찾아 헤맬 때, 40이 되어 대학원 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 어김없이 걱정을 가장한 이런 유사한 말들을 참 많이도 들어왔다.
"누가 너 같은 아줌마를 써줄 것 같아?!"
"특수대학원 치고는 잘하는 걸로 써봅시다"
"어차피 박사논문도 아닌데 뭘 그리 열심히 써?!"
그때 "너나 잘하세요"를 시전 해줬어야 하는데 순진했다. 그들의 걱정 어린 핀잔이 사실일까 봐 두려운 마음이 꽤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 나는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취업에 성공을 했고, 그때 일을 발판으로 나름 사업도 했다. 그때 썼던 논문으로 상도 받고, 지금은 주변인들이 더 자랑스러워하는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물론 그런 성과가 없었어도 그때의, 그리고 지금의 도전을 후회하진 않는다.
이런 나에게는 열심히 야학에서 공부를 한 엄마가 있다. 지금 배워서 뭐 하겠냐는 주변의 타박과 핀잔은 일상이었다. 조금 하다가 그만두겠지 하며 천리안을 자처하는 주변의 예상을 깨고 2년 넘게 공부를 했다. 공부를 해서 대학을 갈 것도 아니고, 함수와 영문법을 익히는 것이 식당 운영에 하등의 도움을 줄 것도 아닌데…. 엄마는 공부를 마치고 상기된 얼굴로 '재밌다'며 수줍게 고백하곤 했다. 무엇을 이루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쉬이 대답하지 못하는 만학도로 우리는 서로를 닮았다.
과연 원대함이란 무엇인가. 꿈꾸는 자 앞에 원대함이 비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