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옹은 후회를 남기고

10일 차(전주 - 완주)

by 잘코사니

며칠 동안 다리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쓰지 않았다. 하지만 아프지 않았던 게 아니다. 만성피로마냥 어느 정도의 다리 통증을 기본값으로 달고 다니니, 그러려니 하게 된 것이다. 어제는 전주국제영화제 기념일 겸 휴식일이었다. 아예 걷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훨씬 덜 걸었을 텐데도 내내 다리가 아팠다. 잠들기 전에 다리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오호라, 왼쪽 발목이 오른쪽의 거의 두 배 굵기였다. 아킬레스건 부근이 땡땡하게 부어있던 것이다. 모두의 주치의인 네이버 지식인에 물어보았더니, 아킬레스건염 증상으로 진단해주셨다. 나와 비슷한 증상에 답변해준 지식인들의 글을 몇 개 읽으니 괜히 걱정이 됐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결코 내 한계를 마주하고 극복하는 위대한 모험을 떠난 것이 아니다. 곧 죽어도 내 몸뚱이, 내 건강이 최우선이었다. 그래서 자고 일어난 후에도 그대로라면 오전에 병원에 들르기로 했다. 오늘 아침, 내 발 상태는 그대로였다. 가까운 정형외과를 검색해 바로 직행했다. 지방이라 어르신이 많긴 한가보다. 병원은 이미 진료를 받으러 오신 어르신들로 가득 이었다. 점심 즈음에나 진료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영화제 영화나 한 편 더 보면서 시간을 기다리기로 했다.


IMG_5139.JPG 내 다리 내놔!

<찰리 되기>를 보았다. 영화 말미, 주인공 찰리도 걸었다. 마약에 찌들었던 자신을 반성하며 밤새 걸었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나도 찰리처럼 다시 걷기 시작했다. 병원에는 들르지 않았다. 생각을 좀 해보니, 병원에 가면 들을 말이 뻔했다. 무리하지 말고 쉬어야 한다. 그 말인즉슨 여행을 멈추어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나를 잘 안다. 그런 말을 들으면 흔들릴 나라는 것을 아주 잘 안다. 영화 속 찰리는 아무리 주변에서 마약 하지 말라고 말리고 재활원에 가둬도 멈추지 못했다. 스스로 깨닫고, 걸으며 뉘우치고 나서야 약을 멈추고 진정한 찰리가 되었다. 따라 하는 건 아니지만 나도 마찬가지다. 결국 내 판단이 제일 중요하다. 여행을 멈추고 푹 쉬면 다리는 아프지 않겠지만 훨씬 더 큰 후회를 할 것 같았다. 병원을 지나쳐 다시 걷기 시작했다. 찰리는 겨우 하루 걸었지만, 나는 이제 열흘 째다. 내가 더 낫다.


IMG_5177.JPG 신선놀음


민호와는 여기까지다. 지난 3박 4일 간 든든한 여행친구가 되어주었던 민호를 떠나보냈다. 덕분에 여행 중 처음 만난 빗길도, 무시무시했던 선 넘어 모텔도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 다시 혼자가 되어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완주군에 접어들었다. 그러는 동안 쨍쨍하던 해가 사라졌다. 길 주변의 산에 구름이 낮게 깔리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느낀 거지만, 해는 없고 비도 오지 않는 흐린 날씨가 걷기엔 최고다. 산마루에 걸린 구름들 덕에 신선이 된 기분으로 걸었다. 그런 날씨 덕인지 아니면 모든 것이 다 있다는 다이소에서 산 발목보호대 덕인지, 다리 통증도 한결 가벼워졌다. 사람 하나 없는 시골길을 가벼운 마음으로 걷는데, 어디선가 "야옹"하고 고양이가 운다. 그러더니 이 귀여운 생명체가 나를 향해 쪼르르 달려온다. 고양이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길고양이가 사람을 따른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자세히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목걸이가 있는 것이 사람 손을 타던 고양이 같았다. 몇 번 쓰다듬어주고 다시 걷는데, 따라온다. 순간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어쩐지 버려진 것 같은 이 귀여운 생명체를 데리고 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고민 끝에 고양이를 안았다. 50m 정도 걸었을까. 현실적인 우려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조금 무거운데, 내가 계속 들고 다닐 수 있을까?', '모텔 같은 숙박시설에 이 친구를 데리고 들어갈 수 있을까?', '여행이 끝나면 그다음엔 어쩌지?' 그 우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고양이를 내려놓았다. 더 이상 따라오지 않고 자리에 앉아 우는 고양이를 자꾸 돌아보며 걸었다. 괜한 미안함에 데려올 걸, 하는 후회가 계속 들었다. 낮게 깔린 구름이 더 이상 멋들어져 보이지 않고, 내 기분처럼 착 가라앉은 느낌이다.


어디선가 잘 지내겠지?


난생처음 그런 다짐을 했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들어 지금까지 꿈도 꿔본 적이 없지만, 만약 내가 반려동물을 키우게 된다면 오늘 만난 친구를 닮은 고양이를 키우겠다고 말이다. 오늘 함께 걷지 못한 아쉬움을 언젠가 달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이 계속 드는 걸 보니, 데려오지 않은 걸 확실히 후회하나 보다. 그렇게 또 후회를 하나 남기고 잠자리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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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6일 금요일(10일 차)
여정 : 전북 전주시 - 전북 완주군
총 거리 : 21.19km(누적거리 : 266.97km)
소요 비용 : 25,200원(모텔 20,000원 + 점심 5,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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