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듯 느린 성장영화

9일 차(전주국제영화제)

by 잘코사니

이제는 까마득한 추억이 된 대학교 2학년 때. 나는 정신머리 없는 젊은이답게 담대한 계획을 세웠다. 한 학기를 휴학하고 그 기간 동안 열심히 과외를 해서 돈을 모아 겨울방학 시즌에 따뜻한 호주로 여행을 떠나리라고 말이다. 하지만 계획대로 되었다면 내가 지금 이 이야기를 쓰고 있진 않을 것이다. 9월이 되자마자 하고 있던 과외 2개를 거의 동시에 잘렸다. 담대했지만 대안을 찾을 성실함은 없었던 나는 그렇게 휴학을 한 채 집에서 놀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렇게 집에서 놀고만 있을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밖에 나가서 놀기로 했다. 마침 하고 있는 부산국제영화제에 가보기로 했다. 그게 내 인생 첫 번째 영화제다.


두 번째 영화제로 이번 전주영화제가 나올 것 같지만, 틀렸다. 난 여전히 담대했기에 이번엔 사이즈가 좀 커진다. 내 두 번째 영화제는 칸(Cannes)국제영화제다. 며칠 전 글에서 잠깐 썼듯, 유럽을 자전거로 여행했다. 그 여행 일정 중 5월 어드메가 프랑스 남부를 지중해를 따라 지나는 여정이었다. 마침 그 프랑스 남부 도시들 중 칸이 있었고, 또 영화제가 있었다. 개막식에 맞춰 레드카펫 행사를 보면 뭔가 그럴듯한 여행의 이벤트가 될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 담대함의 결과로 수많은 인파 속에서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라는 칸국제영화제 레드카펫 행사를 지켜봤지만, 아는 배우라곤 나탈리 포트먼뿐이었다는 슬픈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참 후에야 나의 세 번째 영화제가 찾아오니, 그것이 바로 이 글에서 이야기할 전주국제영화제다.


영화제 허세 : 다들 이런 사진 한 장 씩은 찍잖아요


영화제의 아침이 밝았다. 걷기 시작한 지 9일, 처음 맞이하는 휴식일이었지만 쉴 틈이 없었다. 나의 축제는 아침부터 시작이었다. 어제 영화는 민호와 함께 봤지만, 오늘은 각자 보고 싶은 영화를 따로 보기로 했다. 중간에 만나 점심만 함께 먹고 말이다. 물론, 극장 옆자리에 앉은 여인과 운명적 사랑에 빠지는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점심을 함께 먹지 않아도 좋다는 약속을 나눴다. 곧 죽어도 같이 점심을 먹잔 말이었다. 오전에 영화 <맨 앤 치킨>을 보고, 민호를 만나 전주에만 있다는 물짜장을 먹었다. 그리고 잠시 영화의 거리를 떠났다. 어제 글에서도 말했지만 사실 영화제에 맞춰 도착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럼 전주에 가서 뭘 하지, 고민하다가 전주에 있는 IMAX 영화관이 매우 크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마침 개봉했던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를 전주에 가면 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랬는데 영화제 기간에 맞춰 도착해버렸다. 따지고 보면 <캡틴 아메리카>도 엄청나게 국제적인 영화니까 내 전주국제영화제 스케줄에 추가하기로 한 것이다.


사실 이런 사진은 잘 안찍는데... 그래도 전주까지 갔으니


이 글은 엄연히 여행기니 굳이 내가 본 영화에 대해 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어제 저녁과 오늘 오전에 본 영화(<슈발리에>, <맨 앤 치킨>)와 <캡틴 아메리카>를 연달아 보니, 역시 영화제 영화라는 것이 따로 있긴 하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제가 아니라면 사람들이 '쓸데없이 승부욕만 있어서 온갖 바보 같은 경쟁을 올림픽처럼 펼치는 남자들의 이야기(슈발리에)'나 '어딘가 모자라는 형제들이 자신들의 충격적인 출생의 비밀을 파헤치는 이야기(맨 앤 치킨)'를 굳이 극장까지 가서 보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스토리나 등장하는 배우의 면면이 사람들을 끌어모을 매력으로 충만하지는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유명 배우들이 히어로로 분장해 날뛰고 부수는 스펙타클의 향연인 영화를 보니, 그 대비가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엔 이런 영화도 존재한다고 소개해주는 영화제라는 축제는 분명 의미가 있다.


오늘의 마지막 영화는 <미국에서 온 모리스>였다. 제목 그대로 미국에서 온 모리스 이야기다. 귀여운 흑인 꼬마가 독일로 건너오게 되면서 겪는 소소한 이야기들을 힙합과 버무려 재밌게 풀어낸 성장영화였다. 야외상영이었고 중간에 비까지 내렸지만, 영화가 유쾌했던 덕분에 끝까지 즐겁게 볼 수 있었다. 상영장을 나서니 비는 이미 그쳤고 바람은 선선했다. 축제기간이라는 것이 무색하게 거리는 조용했다. 그 거리의 온도와 습도, 분위기가 모두 좋았다. 그냥 그 순간 그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좋아졌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영화는 필연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담는다. 그 흐름 속에 등장하는 인물 역시 필연적으로 변한다. 그 변화의 방향이 긍정적일 때, 우리는 그걸 성장이라고 말한다. 조금 억지를 부려본다면, 오늘 본 영화들은 그래서 모두 성장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내 여행에도 시간의 흐름이 있다. 그 흐름 속에 존재하는 나 역시 분명히 조금은 변할 것이다. 전주의 거리를 메운 그 밤의 공기를 느끼며, 나는 이 변화의 방향이 긍정적이라 확신했다. 물론 그 속도가 걷는 것만큼이나 느리겠지만 누군가 말했듯,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니까.



그나저나 첫 번째 영화제는 기차, 두 번째는 자전거, 세 번째는 걸어서 갔다. 내 다음 영화제는 어떻게 가야 할까?



2016년 5월 5일 목요일(9일 차)
여정 : 전주국제영화제
총 거리 : 0km(누적거리 : 245.78km)
소요 비용 : 54,200원(게스트하우스 36,000원 + 점심 13,000원 + 저녁 5,200원) *민호와 /2
- 영화 관련 비용은 여행 비용에 추가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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