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여행, 그중 하나

8일 차(익산 - 전주)

by 잘코사니

간밤에 민호와 집중한 일이 있다. 우리에게 나름 중대한 일이었기에 민호는 열심히 보던 성인방송도 잠시 멈춰두고 머리를 맞댔다. 바로 '전주국제영화제' 영화 티켓을 예매하는 일이었다. 애당초 출발 전에 전주에서 영화제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대략적인 속도로 미뤄봤을 때, 영화제 폐막 전에 전주에 들어가지 못할 거라 짐작했다. 그래서 아쉽지만 마음을 접어두고 있었는데, 내 계산이 틀렸거나 혹은 내가 매우 빨랐던 게다. 5월 4일인 오늘 나는 전주에 입성할 예정이고, 7일이 폐막인 영화제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오늘 도착해서 내일 하루는 전주에 머물며 영화제를 즐기기로 결정했다. 그러려면 당연히 영화를 봐야 할 터, 간밤에 서둘러 영화제에서 볼 영화를 골랐다. 영화 예매를 훌륭히 마치고 푹 잔 덕에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여전히 음산한 선 넘어 모텔을 나오니,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 쨍쨍한 해가 우리를 반겼다.


반가워!


땀은 보석이라고 했던가. 무더운 날씨 속에 땀을 줄줄 흘리며 얼마를 걸었을까, 저 멀리 반짝이는 거대한 보석이 보였다. 유치한 비유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아쉽게도 이건 비유가 아니다. 보석의 도시라는 익산의 유명 관광지인 보석박물관이 나타난 것이다. 거대한 다이아몬드가 공중에 매달려 반짝이고 있었다. 그 생경한 풍경에 놀랄 틈도 없이, 그 옆으로 더 거대한 브라키오사우르스가 등장한다. 이번에는 공룡박물관이었다. 그리고 아쉽게도 거대한 뭔가는 없었지만, 화석박물관도 있었다. 익산이라는 도시에 대해 아는 바가 워낙 없었기에 이미지랄 것도 없었지만, 이 나란히 선 세 박물관 덕에 익산에 대한 확고한 이미지가 생겨버렸다. 보석도, 공룡도, 화석도 모두 오래되고 땅에 묻혀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생전 처음 익산에 온 경기도 촌놈은, 익산은 뭔가 오래되고 땅에 묻힌 도시 같다는 이미지를 기억 속에 묻었다. 언젠가 다시 익산에 오게 된다면 그 기억이 화석처럼 발굴되리라. 혹시 이런 생각이 30만 익산시민에게 불쾌함을 드린다면 사과드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화석이 되어가는 내 기억까지 어쩌지는 못할 것 같다.



보고픈 엄마 찾아 떠나는 둘리처럼 전주를 향해 열심히 걸었다. 만경강을 건너자 전주를 알리는 표지판이 등장했다. 드디어 전주에 진입한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시점부터 고비는 시작된다. 표지판은 어디까지나 행정구역상의 경계를 의미할 뿐, 내가 주로 목적지로 삼는 시내와는 여전히 거리가 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경계를 넘는 순간 이미 도착한 것 같은 성취감 비슷한 것을 느끼게 된다. 실제 갈 길은 꽤나 남아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몸과 마음의 긴장이 풀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몸은 참고 있던 통증들을 슬그머니 올려 보내고, 마음은 각종 유혹에 시달린다. 어차피 다 왔는데 뭐 좀 먹고 쉬었다 갈까, 아니면 얼마 안 되는 거리니 버스를 탈까 하는. 물론 난 오늘도 그런 유혹들을 굳은 의지로 이겨내고, 마침내 내 두 발로 목적지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전주영화제의 중심지인 영화의 거리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만경강을 건너 전주로, 전주로


대전을 떠나고 3일 만에 전주에 도착했다. 그 말인즉슨, 사람 구경을 3일 만에 한다는 의미다. 오랜만의 북적이는 인파들을 보니 괜히 기분이 들떴다. 씻고 가벼운 차림으로 전주 구경에 나섰다. 저녁에 영화도 한 편 예매해놨다. 시간이 좀 남았으니 밥을 먹고 쇼핑(!)을 하기로 한다. 여벌의 신발로 슬리퍼를 가져온다는 걸 잊었다. 그래서 이런 여유가 생기는 날 신을 슬리퍼를 하나 장만하기로 한다. 대충 신고 버릴 수 있는 쪼리를 사고 싶었으나, 아직 계절이 일러 나오지 않았단다. 아쉬운 대로 슬리퍼를 하나 사 신고, 전주는 역시 비빔밥이니 저녁으로 육회비빔밥을 먹고 극장으로 향했다. 극장 앞에서 지인도 만났다. 때마침 연휴를 맞이해(며칠 전 징검다리 휴일인 5월 6일 금요일이 임시 공휴일로 지정돼 4일간의 연휴가 만들어졌단다. 백수인 나와는 별 상관이 없다만) 영화제를 보러 왔단다. 여기까지 걸어왔다는 내 말에 세 글자로 나를 반겨주셨다. "미친놈."


IMG_5127.JPG 다양한 영화, 다양한 포스터, 다양한 사람, 다양한 여행, 다양한 인생, 다양한 생각... 많은 다양함들


영화를 보고 나오니 영화의 거리가 조명으로 밝게 빛난다. 축제의 밤 같은 풍경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100 FILMS, 100 POSTERS"라는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100이라는 숫자처럼 다양한 영화가 모였다는 상징 이리라. 그 다양함의 거리를 걸으며 내 여행에 대해 생각했다. 많은 이들이 의아해하거나 신기해했고, 나조차도 확신을 가지고 떠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걸어보니 이 도보여행도 그냥 다양한 여행의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니 남들을 의식할 필요도, 또 뭔가 다르게 여행한다고 우쭐댈 필요도 없다. 그저 다른 모든 여행들도 그렇듯, 주어진 상황과 조건 속에서 최고로 즐겁고 보람찬 여정을 위해 노력할 뿐이다. 다만 먼 훗날 내 인생이라는 한 편의 영화가 마무리될 때, 이 여행을 떠나는 시퀀스가 재미있는 부분으로 기억된다면 좋겠다. 하이라이트까진 아니고, 영화 초중반의 재미 포인트 정도면 딱 적당할 것 같다. 난 젊기에, 내 인생의 절정은 아직이다. 내 여행도, 내 인생도 축제는 이제부터 시작이라 믿어본다.





2016년 5월 4일 수요일(8일 차)
여정 : 전북 익산시 - 전북 전주시
총 거리 : 29.31km(누적거리 : 245.78km)
소요 비용 : 78,000원(게스트하우스 36,000원 + 점심 16,000원 + 저녁 26,000원) *민호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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