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차(논산 - 익산)
개인적으로 이 여행에 국토대장정이라거나, 국토종주 따위의 수식어를 붙이고 싶진 않았다. 냉정하게 말해 끝에서 끝까지 가는 여행도 아닐 뿐더러, 그런 단어는 뭔가 모르게 스스로의 한계에 도전하는 극기훈련 같은 느낌을 줬다. 난 어디까지나 여행의 방식으로 걷는 것을 선택했을 뿐, 내 한계와 마주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프면 멈추고, 힘들면 쉬었다 가는 것이 이 여행에 대한 나의 분명한 태도다. 날씨를 비롯한 걷는 환경에 대해서도 내 태도는 마찬가지다. 어제부터 내린 비가 그치지 않고 있다. 이 비와 더불어 화물차가 쌩쌩 지나가는 도로의 조합은 도보여행자가 호감을 느낄 만한 환경은 분명 아니었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오후부터는 날이 갠다고 했다. 논산 시내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 후, 카페에서 비가 그치길 기다리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약 10km를 이동해 시내에 진입했다. 걸었다면 두세 시간 정도 걸렸을 거리를 30분도 걸리지 않아 도착했다. 역시, 바퀴의 위대함이란!
카페에 앉아 비 오는 바깥 풍경을 보고 있으려니, 그렇게 여유로울 수가 없었다. 잠깐 내가 여행 중이란 사실을 잊어버리려다, 맞은편 민호의 행색을 보고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민호가 물었다. 이 여행을 하면서 좋은 점이 뭐냐고. 이제 겨우 일주일 됐지만, 이 도보여행이 준 가장 큰 즐거움은 이거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 내 몸도, 마음도, 내가 걷는 풍경도 말이다. 모든 직장인들이 비슷하겠지만, 회사를 다니며 날 가장 힘들게 했던 건 매일이 다를 바가 없다는 거였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는 철없는 결정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적어도 이 여행을 하는 동안은 나의 매일이 다르다는 것. 달라질 하루를 위해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걷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변화가 분명 긍정적이라는 것. 그것이 나를 걷게 하는 원동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빗줄기가 약해졌다. 물을 먹은 듯 무겁게 느껴지는 몸을 일으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비가 내렸다 멈췄다를 반복했다. 바람까지 부니 아무리 걸어도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도 민호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논산의 경계에 다다랐다. 그리고 이어 등장한 도시는, 전라북도 익산이었다. 여행을 시작하고 일주일 만에 전라도 땅을 밟게 된 것이다.
일주일째 걷다 보니 내 몸의 템포를 조금 알 것 같다. 그래서 다리가 아프든 혹은 버틸 만 하든 주기적으로 쉬어줘야 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한 시간에 5분에서 10분 정도, 거리로 치면 4 내지 5 킬로미터마다 쉬어가는 게 나에게 딱 적당했다. (이렇게 표현하기 웃기지만) 여기서 도보여행의 팁 하나. 아무래도 가다가 앉을 곳이 나오면 쉬어가기 참 좋다. 그런데 종종 이런 경우가 있다. 걸은 지 한 시간이 조금 못 미쳤을 때, 이를테면 45분, 50분 걸었는데 앉을 곳이 나오면 처음에는 지나쳤다. 쉬기로 생각한 한 시간이 안됐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간혹, 그다음 한동안 앉을 곳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런 상황을 몇 번 겪고 나니 융통성을 발휘하게 된다. 생각한 시간이나 거리에 도달하지 못했어도 앉을 곳이 나오면 일단 쉬었다 간다. 그리고 앉을 곳 중 최고는 역시 버스정류장이다. 의자가 길쭉해 다리를 쭉 펴볼 수 있고, 지붕도 있어 오늘 같이 비 오는 날에도 좋은 휴식처가 되어준다.
오후 5시가 넘어가자 드디어 해가 나오기 시작했다. 뿌연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영역을 점점 넓혀가는 모습이 가히 장관이었다. 민호와 나는 자주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물론 눈보다 더 좋은 카메라는 없지만, 그래도 꼭 찍어보는 게 사람이다. 찍고 나서는 역시 보는 것만 못하다고 말하면서도, 다시 한 번 찍어보는 게 찌질한 나이기도 하다. 친구랑 축구 게임을 할 때, 서너 판을 내리 지고도 마지막 판을 이기면 왠지 내가 이긴 기분이 들었다. 비슷한 기분이다. 하루 종일 빗물에 몸을 적시며 걷다가 해가 나오니 괜시리 기분이 좋아졌다. 민호도 마찬가지였는지, 지칠 만도 한 시간이지만 걸음걸음이 가벼워 보인다. 덕분에 삼보일촬(세 걸음마다 1회 촬영)의 속도로 걸었음에도 해가 저물기 전에 목적지로 삼은 모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텔 이름이 '선 넘어 모텔'이다. '산 넘어'를 잘못 쓴 것이 아니다. 지도상으로 적당한 거리에 위치한 모텔이었기에 오늘 목적지로 삼았는데, 그 이름과 외관에서 풍기는 음산한 기운에 괜히 들어가기가 꺼려졌다. 어쩌면 더 이상 영업을 하지 않는 모텔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혼자였다면 더더욱 꺼려졌겠지만, 남자가 둘이니 일단 들어가 보았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영업 중이었다. 돈을 치르고 방에 들어가려는데 복도의 창문은 왜 다 막아두어서 이렇게 어두운지. 아무튼 괜히 문이 제대로 잠겼나 한 번 더 확인을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민호가 잠이 오지 않는지 자꾸 TV를 틀었다. 뭘 보나 했는데, 성인방송을 보고 있었다. 거의 매일 모텔에 묵었지만 오늘에야 민호 덕분에 알게 된 사실. 대부분의 모텔은 성인방송을 제공한다. 뭘 보고 있는 거냐는 물음에 궁금해서 틀어봤다는 답변이 돌아왔지만, 뭔가 선 넘어 모텔의 묘한 기운이 그를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애써 그 기운을 무시하고 눈을 감았다. 다행히, 선을 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2016년 5월 3일 화요일(7일 차)
여정 : 충남 논산시 - 전북 익산시
총 거리 : 23.35km(누적거리 : 216.47km)
소요 비용 : 42,000원(모텔 30,000원 + 점심 12,000원) *민호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