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은 좀 가려도, 잘 자라고 있구나
도은이는 내 딸이 확실하다. 일단 외모가 그렇다. 나를 빼다 박았다, 까지는 아니지만 아내보다는 확실히 나를 닮았다. 태어나기 전부터 간절히 외모는 모조리 아내를 닮기만을 바랐는데, 안타깝게도 현재까지는 나를 더 많이 닮았다. 바람직한 성장을 기대하는 수밖에. 그다음으로는 낯가림이다. 도은이는 낯가림이 많이 심한 편이다. 잘 걸어가다가도 앞에서 누구라도 다가오면 아내에게 곧장 매달리고, 엘리베이터 같은 밀폐된 공간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아내에게 안겨 고개를 푹 숙여 품에 묻고는 가만히 있는다. 놀이터에서 많이 마주치는 또래나 언니, 오빠들에게도 비슷하다. 간혹 붙임성 좋은 아이들이 다가와 말이라도 걸면, 고개를 푹 숙이고는 그저 “아냐, 아냐.”만 반복한다. 아내는 어린 시절부터 활달했다고 하던데, 사실 아내의 과거를 살필 필요도 없다. 내가 딱 그랬으니까. 나이를 좀 먹을 때까지도 엄마 껌딱지에, 그렇게 잘 울었단다.
어린이집 적응기간을 가지고 있는 지금도 상황은 비슷하다. 아주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30분 동안 아내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친구들과도 아직 어울리지 않는다. 뭐, 당연히 도은이에게는 모든 것들이 처음일 테니 낯설고 어색하고 무서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게 너무 심하지 않고 차차 나아지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러던 오늘, 나는 도은이가 나아질 거라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약간 감동을 받아버렸다.
오늘 갑작스럽게 계획에 없던 친구 집에 방문하게 되었다. 오후 외출로 마땅한 곳이 떠오르지 않아 동네 친구에게 어디를 놀러 가면 좋을지 물어봤더니, 대뜸 집에 놀러 오라고 하기에 그러겠노라 했다. 8살 여자, 5살 남자아이 둘이 있는 집이어서 도은이의 낯가림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달리 갈 곳도 없고 어린이집도 다니기 시작했으니 또래들을 여러 기회로 마주치면 좋지 않을까 해서 가보았던 것이다.
문에 들어선 순간부터 낯설어하던 도은이는 아니나 다를까, 아내 품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역시나, 하는 표정의 아내와 눈을 마주쳤고, 울기라도 하면 바로 나갈 요량이었다. 도은이가 그러든지 말든지, 친구의 두 아이는 우리 가족의 방문을 반가워하며 거실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즐겁게 놀기 시작했다. 특히나 5살 준혁이는 본인이 오빠가 된 것이 신이 났는지 도은이를 안은 아내 주변을 돌며 재잘재잘 떠들었다. 그런 언니, 오빠의 모습을 도은이는 겁은 나지만 호기심 가득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오자마자 나가지는 않겠구나, 안도했다.
준혁이가 이 글을 볼 리는 없겠지만, 이 글을 빌어 준혁이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준혁이는 본인 장난감과 인형들을 이것저것 가지고 와 도은이 앞에 늘어놓고는, 하나하나 소개를 시켜주었다. 뿐만 아니라 땀을 뻘뻘 흘려가며 구연동화마냥 다양한 대사와 행동으로 장난감 역할놀이를 보여주었고, 그 와중에 도은이가 관심을 보이는 것들은 망설임도 없이 선뜻 내어주었다. 친구도 준혁이가 저렇게 신나는 건 흔치 않다며 놀라워했다. 그 모습을 보는데 괜스레 흐뭇하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 정도면 감동까지는 받지 않았을 거다. 도은이가 어느 정도 낯가림을 풀었지만, 위의 사진처럼 아내 품을 쉽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며 친구 부부와 잠깐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내가 ‘혼자’ 나타났다. 뭐지, 싶었지만 아무리 봐도 주변에 도은이가 없었다. 도은이는 어딨냐는 나의 질문에 아내는 조용히 하라고 했고, 입을 다무니 준혁이가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준혁이가 방에서 자기 장난감을 도은이에게 소개해주는 동안 아내는 슬며시 방을 빠져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도은이가 분명히 엄마가 없어졌다는 걸 알만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별다른 소리도 없고, 나오지도 않았다. 그렇게 2-3분 정도가 흐르는 동안, 마음이 괜히 이상했다. 도은이가 또래와 어울리는 모습을 처음 본 것이다. 그 모습이 좀 신기하기도 하고, 벅차기도 하고 그랬다. 낯가림이 너무 심하지는 않나 했던 걱정도, 시간이 흐르면 알아서 좋아지겠구나 싶었다. 우리 도은이가 잘 자라고 있구나,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도은이가 크면 클수록, 친구도 많아지고 그만큼 우리와의 시간이 줄어들 거다. 어쩌면 이제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한 지금이, 그 시간이 줄어들기 시작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오늘, 또래와 어울리는 도은이의 모습을 처음 보며 감동을 하면서 동시에 다짐을 한다. 훗날, 과거를 돌이켜보며 도은이와 함께 더 시간을 보내지 못했음을 아쉬워하지 않게, 도은이와 함께인 지금에 더 충실해야겠다고 말이다.
오늘의 도은
- 민주시민으로 거듭나는 도은 : 곧 지방선거가 있다고 한다. 당연히 몰랐고, 관심도 없었는데 우편으로 선거 홍보물이 와서 알았다. 도은이는 그 홍보물들에 관심이 많았고, 오늘 그걸 다 늘어놓고는 이리저리 만지고 놀았다. 덕분에 나와 아내도 홍보물들을 관심 있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구를 뽑아야 할지는 잘 모르겠어서, 도은이한테 골라달라고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