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30

by ZAMBY




혜정이 고른 영화는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열아홉에 아이를 낳은 여자와 그 여자를 떠난 남자의 이야기.

지금처럼 차갑고 매마른 겨울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였다.



“나는 싫어. 여자만 고생하는 이야기.”

너의 집에서 주말 영화를 보다가 무심코 내뱉었다.

나는 한국 영화에서 여자들이 성적으로 착취되거나

심리적으로 휘둘리는 장면을 볼 때면 배가 아프곤 했다.

매운 음식을 먹는 것처럼 속이 쓰리고 머리가 후끈해졌다.


화난 듯 너의 품을 벗어나 곧게 앉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네가 물었다.

“여자만 고생하는 것 같아?”

“응, 저걸 좀 봐. 늘 저래. 남자들은 항상 도망치거나 숨는 방식이라구.”

너도 소파 위에 옆으로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우리는 다툰 연인처럼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너를 원망하고 싶었던 걸까.

갑자기 전화번호를 바꾸고 사라졌던 스물세 살의 겨울.

나의 시험에 백지만을 제출했던 스물네 살의 봄.

이메일 제목만으로 이별을 확고히 했던 스물일곱의 여름.

내가 질문하거나 잘잘못을 따질 만큼의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던 너의 태도들이 생각날 때면

곁에서 웃고 있는 네 마음을 짓밟고 싶어 져서 때 없이 날을 세웠다.


“좀 비겁해 보일 수는 있는데... 남자도 아파서 그래.”

고개를 돌려 너를 보았다.

“아파서 피하는 거야. 정면으로 마주하다 다치면 고통스러우니까.

고통의 크기가 클수록 외면하고 싶어 져.”

화면 속에 남자가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래도 그러면 안 되는 건데. 네 말이 맞아. 그러면 안 돼.”

너는 뭔가 생각난 듯 되뇌었다.


“난 저런 형태의 구조가 싫다는 말을 하는 거야. 널 말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는 안 그럴 거야. 차라리 넘어져서 우는 한이 있더라도 피하거나 외면하지 않을게.

너한테 만큼은.”

너는 진지했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남자들이 좀 더 솔직해지면 좋겠어.”

“솔직하면? 그러면 사라진 믿음이나 애정 같은 게 마법처럼 다시 살아 나?”

목덜미에 닿아있던 너의 손이 내 얼굴을 감쌌다.

“그러면 좋겠다. 그때 말해줘."

나는 네가 말하는 그때, 가 언제 인지 몰라 숨을 삼켰다.


"내가 미워지거나 싫어졌을 때 말해줘.

솔직하게 매달려보라고 그러면 다시 사랑할 수 있다고.”

유약하고 처량한 눈이었다.

“약속해. 그렇게 말해주기로.”


“알았어. 그럴게.”

마침내 네 표정이 풀어졌다.


“주말 공짜 영화 보다가 이럴 일이냐. 남자들한테 너무 그러지 마. 날 세워서.”

내 얼굴을 감싸고 있던 너의 긴 손과 팔이 내 몸을 감싸 안았다.


“내가 날을 세워? 너한테?”

나는 몸을 뻣뻣하게 세웠다.


“넌 그 자체로 날이야. 아이고 아파라.”

너는 더 세게 안으며 우는 소리를 내었다.

“괜찮아. 아무리 아파도 안을 수 있어.

내가 이제 웬만한 통증에는 이골이 나서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거든.”


너의 고백들은 나를 향해 있지만 과거 위에 올라앉아 있어

그때의 나에게는 충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이들로 인한 네 흉터까지 끌어안아야 함을 알아서

그만 세운 날을 접기로 했다.


네가 나를 ‘날카로운 존재’로 명명하던 그날

나는 홀로 네 상처를 품어 안아 둥글게 만들었다.


스크린 위에 나와 너의 이야기가 덧대어져

나는 또 다른 영화를 한 편 보는 듯 넋을 놓고 앉아있다.

앤딩크레디트가 올라가자 표정 없이 화면을 보고 있던 혜정이 말한다.

“닭볶음탕 먹자”


우리는 근처 닭볶음탕 집으로 향한다.

“은정이 연락 왔어?”

“아니.”

“재밌나 보다.”

“응.”


대로변 뒷길에 닭볶음탕 집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하다.

자글자글 붉은 양념을 끼얹은 감자와 당근. 양파. 흰 닭의 몸체.

초록빛 소주병. 보글보글 연기가 피어오른 좁은 가게 안에 시끌시끌한 사람들.

감색 앞치마를 뒤집어쓰고 밥알을 튀기며 떠드는 아저씨.

구석에서 조용히 그릇에 닭다리를 퍼담아 내려놓는 사이좋은 커플.

국물이 다 졸아붙어도 불을 끄지 않고 소주만 마셔대는 남자들.


가게 입구 앞 남은 빈자리에 가방을 끌어 앉은 채 엉거주춤 앉아본다.

혜정은 닭볶음탕이 나오기 전에 소주를 한 잔 따른다.

우리는 각자 소주를 따른다.

테이블에 놓인 당근과 오이를 오독오독 씹으며 소주잔을 들어 올린다.

그녀는 말로 내뱉는 것보다. 먹어 삼키는 쪽을 택한 듯 하다.

나는 별 의미 없는 말들을 늘어놓는다.

“여기 주인 바뀌었대. 전보다 맛이 없어졌다던데.”

“이상하게 사람은 여전히 많네. 저 아저씨 너무 시끄럽다. 다른 조용한 곳으로 갈 걸 그랬나. 근처에 닭불고기 집 괜찮던데.”


혜정의 검은색 코트가 바닥에 떨어진다.

둥글고 작은 의자에 올려둔 코트를 주우려 혜정이 몸을 숙인다.

풀어진 코트를 둥글게 말던 혜정에게서 눈물이

툭. 떨어진다.

검고 번들거리는 안감에 떨어진 그녀의 눈물은

검은 원을 그리며 몸집을 불린다.

일그러진 동그라미가 톱니 모양으로 길게 늘어진다.

나는 더 조급해진다.

닭볶음탕을 먹으며 할 이야기를 열심히 찾는다.

아무리 버둥대도 떠오르지 않는다.


체념하고 소주를 마신다.

누군가는 결혼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피로연에 간다.

잘 살아보고 싶어서.

각자 행위를 한다.

적절해 보이는 것들, 그 당시에는 옳다고 생각한 것들을.

왜 그랬냐고 물을 수가 없다.

그때는 그게 가장 좋은 거여서.


둥근 알루미늄 테이블 위에 놓인 네모난 가스버너를 내려다본다.

혜정은 얼룩이 스며든 코트의 안감을 두어 번 툭툭 두드리고

둥근 의자 위에 단단하게 올려둔다.

다시는 떨어지지 않도록 다짐하듯 코트 덩어리를 매만진다.


닭볶음탕이 앞에 놓인다.


탁, 불이 켜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