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네 아버지는 네가 열일곱 되던 해에 바다로 사라졌다.
채권자들은 네 아버지가 사라진 집 앞을 메우고
엄마를 붙잡고 울었다 했다.
엄마는 너와 동생을 위해 무엇이든 했다.
누군가의 인생을 무너뜨린 아버지의 호기로움을 보상하듯
엄마는 뼈가 빠지도록 일했다.
매일 신에게 빌었다 했다.
이 죄를 사하소서. 좋은 곳으로 보내소서.
명절을 맞아 너의 집으로 간다.
나는 아직 너의 가족을 만난 적이 없다.
집은 내가 대학생 때 가보았던 그대로 서 있다.
작은 골목에 마주 보고 있던 2층 양옥 주택들은 빌라 건물로 바뀌었다.
이제 그 낡은 주택은 5층짜리 신축 빌라가 만들어낸 그늘 아래에 서 있다.
거실 가운데에는 담요가 놓여있고
넓지 않은 집안은 온기로 훈훈하다.
네 어머니는 웃고 있다.
마디 굵은 손. 주름 파인 얼굴. 촘촘하지 않은 정수리.
따뜻한 담요를 내 무릎에 덮는다.
“고마워요.”
그녀는 첫인사를 건네고 마주 앉은 나를 본다.
염치를 지키며 살아온 여인의 아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알 길 없어
그저 고개를 떨군다.
내 손 위에 놓인 여인의 손은 거칠고 따뜻하다.
잠깐 너와 눈이 마주친다.
너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모양의 미소를 짓는다.
이유도 모르게 그저 슬프다.
그녀의 손에 내 손을 포갠다.
“너무 이쁘네... 이쁘다...”
포개어진 손을 꼭 쥐며 그녀는 감탄한다.
그것이 고맙다는 인사의 또 다른 표현임을 알고 있다.
“어머니 그만해요. 애 부담되게.”
너는 건조하게 툭 내던진다.
“아고 내 정신 좀 봐. 고등어 조림 해뒀어요. 점심 먹자.”
급히 일어나는 그녀의 뒷모습은 느리지만 경쾌하다.
함께 늦은 점심을 먹고 집을 나선다.
“또 놀러 와요. 뭐 좋아해요? 내가 다 해줄게.”
거칠고 단단한 손이 깡말라 볼품없는 내 손을 감싼다.
아무 일도 못해 낼 내 여린 손이 부끄러워 감추고 싶어진다.
“감사합니다. 또 놀러 올게요.”
집을 나와 길을 걸으며 깍지 낀 네 손을 힘주어 잡아본다.
좀 더 수다스러우면 좋을 텐데.
우리가 좀 더 많은 말을 한다면 지금의 감정을 남길 수 있을 텐데.
나는 서투르고 너는 말이 없다.
나는 뒷걸음치고 너는 다가선다.
사랑하는 일이 가볍고 달콤하면 좋을 텐데.
나는 이 무거움이 어렵다
삶의 중력이 크게 느껴질수록 연애는 발랄하고 상큼하기를 바란다.
진지하고 육중한 사랑에 임하는 것은
방패 없이 전쟁에 나선 무사처럼 고독하다.
나는 몇 번 진하고 무거운 달콤함에 매료되어 사랑에 빠졌지만
결국에 그 무게에 짓눌려 백기를 들었다.
사랑은 원래 무거운 것인가.
너의 어머니를 함께 만난 우리는 더 가까워지고
좁혀진 거리만큼 우리의 관계는 더 무거워진다.
거리는 남은 명절 연휴를 즐기는 사람들로 붐빈다.
네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근처 횟집으로 향한다.
명절이면 오랜만에 만나는 얼굴들.
10년 전에도 모였던 얼굴들.
더러는 멀어지고 더러는 잊혔지만 우리는 시간을 건너 같은 자리에 있다.
지갑 속에 학생증 대신 명함을 채운 너의 친구들이 저기 어디에 있다.
나는 너의 삶 속으로 스민다.
너는 손짓하고 나는 따른다.
저기 한 무리가 손을 흔든다. 떠들썩한 횟집 안에.
큰 홀 안에 테이블마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가족들,
중년의 남자와 여자,
젊은 연인과 또래들로 북적인다.
곧 결혼한다는 민욱 커플, 아이들을 동반한 동우 가족,
8살 어린 여자친구를 데리고 온 태민,
모두 자기 짝을 동반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9년 전에도 각자 짝이 있었고,
이제는 그때와 다른 짝을 동반해 모여있다.
너만 그때와 같은 여자를 데리고 왔다는 생각이 들어, 혼자 웃는다.
그리고 이내
내가 없던 네 지난 명절들이 떠올라 또 한 번 흐리게 웃는다.
민욱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흰 봉투를 내민다.
“재수 씨, 꼭 오십쇼.”
민욱은 나를 처음 만났던 날에도 눈가에 장난기를 가득 담아 인사를 건넸었다.
“재수 씨, 이 놈 잘 부탁합니다. 힘들면 전화해요. 하하.”
그때도 나는 재수 씨였다.
우리가 햄버거 가게에서 일을 하던 그 겨울에
민욱은 가게 홀에 앉아 긴 겨울방학을 보냈다.
네가 아르바이트를 마치면
민욱은 일을 하고 있는 나에게 행선지를 알려주곤 했다.
일을 마치고 딱히 갈 곳이 없었던 나는
못 이긴 척 네가 앉아있던 만화가게나 호프집에 찾아갔다.
민욱은 늘 나를 네 옆에 앉혔다.
그리고 이야기를 했다. 내가 너에게 직접 듣지 못하는 이야기를.
그때 나는 민욱이 TV쇼에 나오는 진행자 같다고 생각했다.
민욱은 말수가 적은 너의 입에서 제법 많은 이야기를 끌어냈고,
어색한 듯 앉은 나를 그 대화 속에 자연스럽게 밀어 넣었다.
우리가 첫 연애를 하던 그 겨울에
민욱은 군에 입대했다.
가끔 학교로 민욱의 편지를 받았다.
때로는 전화가 걸려왔다.
민욱과 통화를 하면 너와 함께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가 말년 휴가를 나왔을 때도 함께 저녁을 먹었다.
너와 헤어진 후였다.
그날 민욱에게 때아닌 고백을 받고
우리의 이상한 관계는 정리되었다.
너를 다시 만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순간이었다.
나는 민욱에게 말했다.
“네가 군대에 있다 보니 많이 외로워서 그래. 제대하고 나오면 괜찮아질 거야.”
민욱은 멋쩍은 듯 웃었다.
“그래. 내가 많이 외로운가 보다. 하하.”
그 나이 또래의 남녀가 그러하듯 우리는
대부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각자의 외로움을 달래느라 급급해 상대의 본심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가 옳고 그른지 판단하기에 젊음은 너무 유치하고 성급했다.
민욱의 청첩장을 들고 너를 본다.
네 표정 속에 그 감정을 나는 해석할 수가 없다.
너는 뜨겁고 애틋하지만 내가 확신하기에 부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저절로 찾아오는 내일처럼,
어떠한 노력도 없이 너와 함께하게 되기를,
노력 없는 결실에 관하여 생각한다.
테이블 아래로 너의 손이 내 손 위에 포개진다.
‘괜찮아. 지금은 그런 생각 안 해도 돼.’
네 피부가 나에게 말을 건넨다.
너의 손은 언제나 말보다 먼저 나를 위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