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조건

41

by ZAMBY


혜정의 생일은 겨울의 초입이다.


단풍도 흘러내려 별 볼 것이 없고

한 해가 저무는 냄새는 서늘하게 다가오는,

그런 계절에 혜정은 태어났다.


은정은 상기되어 있다.

보라색 새틴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살짝 높아진 목소리로 그간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회색 스웨터에 검은색 진을 입은 혜정은

불판에 올려진 고기를 뒤집을 타이밍을 노리고 있다.


은정은 잔에 든 투명한 소주를 한잔 들이켜곤

겉보기에 괜찮은 그 남자와 진전된 관계에 관해 이야기한다.

아무래도 그녀는 다시 한번 연애를 시작하려는 듯하다.


내가 지난여름 그녀의 집에서 만났던, 그는

베트남으로 가버린 바텐더와는 다르게 눈이 둥글고 시원하다.

훤칠하고 목소리도 적당하여 고양이처럼 살랑대던 이전의 남자보다는 나아 보인다.

은정이 그와의 잠자리에 대해 너무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해서

고기를 뒤집던 혜정에게 경고를 당한다.

혜정은 집게를 들어 은정의 입안에 고기를 밀어 넣는다.

은정은 고기가 입에 들어오자 밥을 한술 떠서 탄수화물과 단백질을 골고루 씹는다.

은정의 보라색 새틴 원피스 위에 잔잔하게 고기 기름이 튄 자국이 보인다.


은정은 유난히 흥분해서 그 남자와 있었던 일들을 상세히 묘사한다.

그가 은정을 즐겁게 해 주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두 사람은 아직 연애를 하는 사이는 아니다.

혜정이 고기를 자르던 가위를 내려놓는다.

달아오른 고기판 위에 둥근 기름들이 보글거리며 몸집을 줄인다.

나는 혜정이 내려놓은 가위를 집어 들고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을 외면한다.


“은정아, 네가 기분이 좋은 건 알겠는데. 그러면 거기까지만 해.

걔는 여자 없이 못 사는 남자야.”

혜정이 무릎에 놓인 앞치마를 둘러쓰며 낮게 말한다.


고기를 자르던 나는 어깨를 살짝 움츠린다.

은정이 소주잔을 만지며 답한다.

“나도 알아.”


우리는 각자 소주를 마신다.

은정은 소주를 털어 넣고

혜정은 한 모금 마신다.

나는 은정의 마음에 동화되어 잔에 남은 소주를 마저 마신다.

여자 없이 못 사는 남자들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생각에

빈 소주잔을 스스로 채운다.


조바심에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뱉는다.

만약에 혹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아, 같은.

“지금 너 만나는 사람도 없는데 뭐 어때. 그냥 즐겨.

그러다가 사귈 수도 있는 거고. 그러다가 결혼을 할 수도 있는 거지.”

내 말에 마침표가 찍히기 전에 혜정이 말끝을 싹둑 자른다.


“그래서 안된다는 거야. 너 또 이혼할 거야?”

“내가 알아서 해.”

고기를 집어 들며 은정이 대화를 마무리한다.

혜정은 반 정도 남은 소주를 마저 비운다.


“사랑받고 싶어.”


은정의 고백에 당황해서 나는 은정의 빈 잔에 소주를 따른다.


”사랑은 나도 받고 싶어.

그래도 좀 기다려서 제대로 받았으면 좋겠다고 제대로 된 사람이랑.“

나는 혜정의 고백에 또 한 번 놀라 그녀의 잔에도 소주를 붓는다.


“제대로 된 게 뭐야?”

은정은 내가 따라둔 잔을 반항적으로 털어 넣고

혜정을 노려본다.

혜정은 채워진 잔을 다시 비우고는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는다.


“제대로 된게 뭔지 몰라서 물어? 사랑을 받으면 그게 고마운줄 아는 거.”


“야, 고마워만 하면 뭘해. 사랑을 달라고. 사랑을.”

은정은 빈잔을 들었다 내려놓으며 소리친다.


사랑을 줘도 되는 사람과 사랑을 하고 싶은 마음.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을 받아 마땅한 사람인가.

사랑을 받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그냥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건 어때? 개나 고양이를 키우면서 시간을 좀 벌어보면?

개와 고양이는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해 주지 않을까?”

내 말에 어이가 없는지 은정과 혜정이 굳은 표정을 거두고 마주보며 웃는다.


“야. 출근할 때 유치원 보내야 하잖아. 엄청 비싸대.”

은정이 파절임을 집으며 손을 아래위로 까딱인다.


우리는 알고 있다.

각자의 몫을

어떠한 선택도 완전하지 않음을.


은정은 전화를 건다.

혜정은 화장실에 간다며 자리를 피한다.

나는 불판 위에 남은 고기를 올리며 너를 떠올린다.


나는 사랑받고 있는가. 그 사랑은 충분한가.

우리는 사랑의 조건을 충족하는가.


테이블 아래 생일케이크 박스가 놓여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사랑해. 결혼'

결혼.까지 메시지를 적다가 멈춘다.


은정은 전화기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다.

보라색 새틴 원피스에 기름이 얼룩진다.

나는 앞치마를 내밀며 그녀의 표정을 외면한다.


화면 속 깜박이던 커서가 검게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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