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계절
미국에 와서 발견한 보석 같은 소설의 제목이다.
<Small Things Like These>
이 소설의 작가인 클레어 키건은
이미 아일랜드와 유럽에서 문학성을 인정받는 유명 소설가이다.
미국에서도 그녀의 인기는 도서관 대출 대기기간으로 증명이 된다.
극도로 절제된 문장이 늘 읽는 이로 하여금 그 이면을 생각하게 하고
분량은 적은 반면 읽는 시간은 많이 걸리는,
읽다 보면, 세밀한 묘사와 여백으로 가득한 시집을 읽는 기분이 든다.
여리고 작은 것들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작가의 시선을 사랑하는 나는
내 딸에게서도 그런 것을 찾아낼 때 큰 기쁨을 느낀다.
무당벌레의 무늬를 세어 나이를 가늠하거나
도마뱀의 숨 쉬는 모양으로 밥을 먹었는지 추측하고
하늘의 구름을 보며 공룡과 나비를 찾을 때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보는
아이들의 시력(?)에 감명받는다.
그리고 이번 여름은 그런 작은 기쁨들이
차곡차곡 쌓였던 시간이었다.
아이는 무료한 여름방학 동안 그림을 그렸다.
미국인들은 여전히 카드에 편지를 써서 주고받기를 좋아하기에
빈 카드 종이에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고
메시지를 적어 넣는 작업을 2달 내내 했다.
어떤 날에는 카드였고, 어떤 날에는 화판이었고,
또 북마크를 만들기도 했다.
자기 작품을 가져와 설명하는 모습이 어여뻤다.
그래서 아이에게 제안했다
"너 그거 많이 모이면 도서관 앞에서 팔아볼래?"
아이는 흥분했다.
자기가 만든 카드가 '돈'이 될 수 있다니.
하지만 세상일이 10살 여자아이 뜻대로 돌아가진 않는다.
"단, 그 수익은 기부를 해야 해."
아이는 실망한 듯 보였다.
"왜? 내가 노력해서 만든 건데 왜 남한테 줘야 해?"
아이는 여태껏 기부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다.
"기부를 하고 기부금의 일정 비율을 엄마가 용돈으로 줄게."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아이가 만든 아마추어적인 카드를 돈을 내고 사줄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싶었다.
하지만 여기는 미국이니까.
미국인들은 소액 기부에 후하니까.
미국인들은 의미에 열광하니까.
여기는 디즈니 스토리가 돈을 펑펑 쓰게 만드는 곳이잖아?
그래서 펀드레이징 행사 준비를 시작했다.
나의 사랑 챗 지피티와 함께.
우선, 어린이 먹거리 지원. 난민가정 지원. 책기부. 중에 어떤 것을 할지 정했다.
그리고 챗지피티에게 물어보니 우리 지역 어린이에게 건강한 먹거리를 매주 배송하는 비영리 단체를 추천해 주었다.
주변 학부형들에게 물어보고, 지역 뉴스 잡지를 뒤적여보니 동네사람들이 사랑하는 단체였다.
지역 도서관에 메일을 보내 행사를 하겠다고 하니
장소를 대여할 수 있는 링크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단체의 허가서와 세금증명서를 첨부하라고 했다.
단체에 전화하니 30분 만에 세금증명서와 레터를 보내주었다.
지역 도서관에 이 두 가지 서류를 제출하고
장소예약을 마쳤다.
이 모든 과정에서 인공지능 집사는 열심히 우리를 도왔다.
그리고 심지어 펀드레이징 행사의 취지를 설명하는 보드 시안과
아이가 왜 이런 행사를 하게 되었는지 구구절절 적은 편지형식의 포스터까지
모두 뚝딱 만들어 주었다.
아이는 이제 나만 좋아하던 버추얼 비서를 함께 믿고 의지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가을 하늘 아래.
상쾌한 바람이 불어오는 어느 토요일 오후.
친구들과 함께 생에 첫 장사. 를 시작했다.
역시 책 읽는 사람들은 다른 건가.
소박하고 때론 후줄근한 옷차람의 도서관 이용자들이
쉬지 않고 발걸음을 멈춰 섰다.
"네가 만든 거야? 너무 예쁘다."
"기부할 거라고? 나도 쉘터에서 일해봤어. 꼭 좋은데 쓰였으면 좋겠다."
"이제 그럼 이곳을 떠나는 거니? 정말 멋진 추억이 되겠구나."
그들은 대학생이었고. 이민자였고. 환경운동가였으며, 누군가의 할머니였다.
모르는 체 지나치는 사람들도 있었고
들여다보고는 굿럭. 을 빌며 떠나는 이들도 있었다.
아이는 그 모든 과정을 온몸으로 통과했다.
자신이 만든 카드와 북마크를 끌어안고.
아이에게 모금액만큼 매칭을 하겠다고 약속을 한 상태라
모금통이 차오를수록 초조해졌다.
큐알코드로 이체한 금액도 서서히 100불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바쁜척하며 장사를 접었다.
1시간 반이 지나고 있었다.
함께 행사를 도와주었던 한국인 이웃들이 아이를 격려했다.
그들은 아이가 '아티스트'가 되어 자신의 그림을 설명하는 동안
현금을 받아주고 답례 쿠키를 건넸다.
아이들은 주변에서 뛰어다니고 마음에 드는 카드를 고르고
딸아이의 그림을 가장 먼저 구입하려고 판매시작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아이도 있었다.
한국 전래동화를 자기만의 시각으로 해석해서
책을 만든 고등학생 언니도 같은 테이블에서 자신의 책을 판매했다.
사람들은 호랑이가 등장하는 한국의 전래동화 그림책을 들춰보며 흥미로워했다.
우리는 김치통에 든 현금뭉치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홍보와 머천다이징을 담당한 친구 두 명과 햄버거 가게로 가서 성공적인 하루를 자축했다.
아이들은 다음 주에 지역 아이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단체에 방문할 것이다.
뚜껑을 열명 김치 냄새가 은은하게 나는 저 종갓집 돈통을 가지고.
작고 사소한 것들.
뜨겁고 긴 하루.
그래서 무료하고 때로 쓸쓸했던 이곳의 여름.
1년 전 여름, 나는 깊은 우울을 경험했었다.
미국에 와서 반년의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이제 어느 정도 현실적인 적응을 마치고 나니
급하지 않은 것들이 마음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때로 외로움이었고.
어떤 날에는 고립감이었으며
그리고 이해받지 못함에 대한 좌절감 같은 것들이었다.
여름은 너무나 길고
하루는 그보다 더 길었다.
이유도 모를 만큼 사소한 것들이 내 마음의 어느 깊은 곳을 건드리고 지나가면
나는 깊이도 모르는 물속에 깊이 침잠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것은 감정, 이라고 하기에 너무 막연하고 형체로 만들 수도 없어서
그냥 툭. 던져버리고 마는.
그래서 나도 그냥 여기저기 뒹굴다가
결국에는 어느 날 일어나 앉았던 것 같다.
감기처럼.
그리고 우리는 다시 여름을 맞았다.
작년보다는 나아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길고 쓸쓸한 계절.
마치 적도의 한가운데 서 있는듯
뜨겁고 무력한 고독의 여름.
세상에 대한 사랑과
삶을 대하는 믿음으로로 가득한 너의 그림들이
그런 계절에 만들어진 것이 신비로와
하나하나 다시 들여다본다.
그리고 내가 지나친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체리와 레몬
이웃의 미소
등대와 바다
민들레와 씨앗
나비와 별
바람과 나무
기대가 무너질 때
믿음이 흔들리고
스스로가 볼품없고 초라할 때
너의 그림을 보아야 할 거 같다.
이제의 누군가의 서랍 속에. 선반 위에 올라가 있을
사진 속의 그림들을.
엄마. 이걸 봐.
이렇게 예쁘다는 걸.
엄마의 삶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야.
내가 그렸어.
나는 이 세상이 참 좋아.
엄마도 그랬으면 좋겠어.
그래.
나도 이제 네 그림처럼 초록. 노랑. 파랑. 빨간색으로 가득한
삶을 즐겨봐야겠다.
그만 불평하고
평가와 자책을 멈추고.
한번 더 너그럽게 어루만져줘야지.
이토록 사소한 것들이
결국에 나를 일으켜 세운다는 걸.
너는 오늘도 나를 가르친다.
지독한 한 여름의 감기를 이겨낸
모든 풀잎이
바람에 흩날린다.
누그러진 햇살이 가만히
내 등을 어루만진다.
모두에게 위로가 되기를!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