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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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MBY




산다는 것은 어쩌면

닥쳐올 거대한 불행 앞에 서기 위한 과정인지도 모른다.


도무지 그 끝과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불가해한 불행 앞에,

서기 위해

인간은 삶이라는 훈련을 거치는지도.


신의 계획이 한 인간을 창조하고 소멸하게 하는

일련의 과정 그 자체에 있다면

우리는 어쩌면 세상에 태어난 특별한 이유가 없는지도 모른다.

그저 태어나 살다가 다른 피조물을 위한 밭이 되고 소멸의 길로 가는 것.

그 과정을 수행하는 하나의 존재일 뿐,

어려서 무료함에 괴롭혔던 개미들이 나에게 큰 의미가 없었던 것처럼.


신은 나를 지켜보고 있을까.

내가 모래알을 바라보듯 큰 무리로 뭉뚱그려 나를 보고 있나.

아니면 망원경을 들이대듯 하나하나 그 형상을 들여다보고 있나.


잠든 엄마의 모습을 내려다본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잠이든 엄마의 얼굴.

희고 고운 피부.

작지만 곧은 콧날.

며칠째 감지 못해 기름기마저 사라진 푸석해진 머리카락

온전한 정신으로 누군가 나의 똥 묻은 기저귀를 바꿔줄 때,

어떤 기분이 들까.

그게 딸이라 다행이다 싶을까.


언제나 단정했던 엄마는

매일 선고되는 불행한 진단을 모른 채

부러진 뼈를 대체하면 나아질 미래를 꿈꾸고 있나.


내가 이렇게 이 여인을 사랑했구나.

내가 아파 잠든 모습을 내려다보며 당신도 이런 감정을 느꼈나.

대신 아팠다면, 내가 대신 죽었다면.

예민한 당신이 혹여 깨어날까 차마 울 수도 없다.


엄마의 손등은 마른 나뭇가지 위에 덮은 비닐처럼 반투명하다.

희고 푸석한 가죽 뒤로 푸른 핏줄이 선명하다.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그 손에 얼굴을 부비고 싶다.

당신이 시장에 간 사이,

벗어둔 옷들을 끌어안고 냄새를 킁킁 맡던 어린 나는

당신의 모든 것이 그렇게도 좋았다.

그럼에도 나는 자랐고,

당신을 떠나고 싶어 부단히 애를 썼다.

당신이 죽어가는 과정 속에 나는 자라고 또 자랐다.


병원에서의 밤은 조용하다.

간호사 두 사람이 모니터를 보고 있다.

어떤 병실은 문이 빼꼼히 열려있고

그 안으로 천정에 매달려 소리없이 움직이는 화면이

병실을 어슴프레 밝히고 있다.


너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생각한다.

이별하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이 마음을 너에게 기대고 있었을까.

너는 나에게 힘이 되고 우리의 믿음은 더 깊어졌을까.

휴대전화를 꺼내 통화기록을 찾는다.

내 최근 통화목록에는 이제 네 번호가 보이지 않는다.


네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작년 어느 밤이 생각난다.

혼자 바다에서 하늘로 가버린 너의 아버지.


“나중에 죽어서 아버지를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어.”

나는 무엇을 물어보고 싶냐는 질문 대신 너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때 우리 생각 안 났었냐고.”

네가 죽어서도 지우지 못할 그 질문이 아파서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네가 살아온 궤적 위에 존재했던 두 남자,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가 서글퍼,

그 남자들이 너의 전이고 또 너의 다음인 것이 황망해서.

그들을 품고 사는 네 삶이 기구해서.

나는 조금 울고싶었던 것 같다.


하늘에 가서도 물어볼 말을 가지고 살아가는 너는,

엄마의 죽음 앞에선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시간을 돌이키고 싶다.

네가 그 여자를 네 집안으로 들이기 전으로.

아니면 너에게 이별을 말하기 전으로.

어쩌면 너를 만나기 전으로.


엘리베이터가 멈춘다.

병원 로비를 지나 밖으로 나온다.

밖은 어둡고 공기는 따뜻하다.

건물 모퉁이에서 시작된 담배 냄새가 바람에 실려 온다.

저들도 죽음을 생각하나.

불에 탄 듯, 모질고 탁한 냄새를 들이마신다.

무력하고 초조하여 찌들고 초라한 냄새가 난다.

내 폐에서도 비슷한 냄새가 날까 봐 숨을 참는다.


나에게 이제 너는 없다.

휴대전화기를 주머니에 넣는다.


빈손으로 거인 앞에 선다.


시공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절망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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