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테지만, 나만이 기록하는 기억
소년은 어린 여동생을 업고 잠깐 다녀오겠다는 어머니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뱃소리가 희미해지며 노을이 지고 있는 바닷가를 바라보며, 칭얼대는 동생을 달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아직 10살이 갓 넘은 앳된 소년이었지만,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밤이 어둑해졌다.
배가 고픈 상황이지만 소년은 그걸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남동생 세명은 너무 배고픈 나머지 물을 한 바가지 마시고 허름한 방 안에서 서로 뒤엉켜 잠을 자고 있을 뿐이었다. 어서 어머니가 돌아오길 바랐다.
하루가 지나도 어머니가 오지 않자, 지나가는 동네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우리 엄니 보셨던가?'. 아주머니는 슬픈 눈빛으로 '아야, 니 이제 맘 굳게 먹어야혀, 동생 잘돌바라잉'.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어린 소년에게도 이제 어머니는 오지 않으실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렴풋이 멀리서 총소리가 나고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리긴 했어도, 소년의 어머니랑 관련 있을 일이라고 생각하진 못했다.
아주 먼 완도 한 바닷가에서 이름 모를 여러 사람이 조직적으로 일본군에 대항하고 항일운동을 해왔다. 소년의 아버지도 그중 하나였는데, 부유했던 선조들의 가산을 팔아가며 그렇게 집안은 몰락해갔다. 하지만 소년의 부모는 뜻이 있기에 그런 것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얼마 있다 해방을 맞이했다. 일본 놈들이 물러가자 부모는 그동안 서러움을 씻은 듯 잊고 기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동안 가족들은 행복한 시간을 만끽했다.
어느 날 평화로운 섬마을에 어떤 사내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인민군으로 위장한 사람들은 섬마을로 들어왔다.
그들은 순박한 동네 사람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학살을 시작했다. 후퇴하던 국군이 인민복으로 위장하여 내려온 후 환영하던 사람들을 잡아끌고 갔다. 6.25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전쟁은 잠시 후에 끝날 줄 알았지만, 이 작은 섬마을까지 영향을 줄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소년의 부모도 그러한 희생자들 중 일부였던 것이다.
소년은 아무리 기다려도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자 갑자기 눈앞이 막막해졌다. 비록 조금 자랐긴 해도 그 역시 아직 어린 나이의 소년이었을 뿐이었다. 계속 동생들은 배를 곪고 집안에서 울기만 했다. 어린 나이지만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우선 밥 동냥을 하며 동생을 먹여야 했고, 다니던 국민학교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었다. 중학교는 일찌감치 포기해야 했다. 그는 집안에 뒤지기 시작했다. 찾아보니 집문서와 땅문서가 있었다. 대대로 이어온 집안의 재산이었다. 너무 배고픈 나머지 재산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빨리 돈을 만들어 배고픔을 잊는 것이 목표였다. 겨우 13살이 되었을 뿐인데 이제 세상에 혼자가 되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소년의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과 함께 끌려가 바다에 수장되었다고 했다. 더 일찍 그들을 따라나선 아버지는 이미 총살되어 나뒹굴어 있었다고 했다. 설마 대한민국 군인이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겠어 라고 생각했지만, 대부분은 총살, 바다에 수장되었다. 인민군으로 위장한 군인들이 내려와 그들을 환영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일명 반동 무자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선량한 주민들을 그렇게 죽여버렸다는 것이었다. 비극적인 상황이었지만, 그 당시 항의조차 할 수 없는 공포스러운 분위기였다. 한 집 건너 한집씩 비극적인 상황을 맞이했다. 바다에 빠진 어머니의 시신은 찾지도 못했다. '니기 엄니 물에 빠져 죽어부렀다'. 작은 목소리로 소년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준 어른도 말만 건네고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소년은 끔찍한 현실이었지만, 아직 그러한 비극을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다.
선산을 팔고 나니 조금 자금이 생겼다. 그는 바로 쌀부터 사서 동생들을 먹이기 시작했고, 아주 어린 남동생을 불러놓고 이제 엄마는 오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했다. 사실 할 수 있는 건 별로 많지 않았다. 아주 작은 완도 섬마을에서 다 쓰러져가는 집 밖에 남지 않았다. 찢어지게 가난한 그 시절을 어떻게든 넘겨야 했다. 나무껍질을 잘라다 끓여먹기도 하고 밥 동냥은 매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동생들만 배 곪지 않는다면 견딜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이제 소년의 티를 벗기 시작한 그는 빨리 생계를 정상으로 유지해야만 했다. 동생들은 아직 너무 어리고 자신이 돌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혼사 자리가 들어왔다. 동네 3살 많은 누나였다. 소녀는 고왔고, 생활력이 강했다. 그녀도 돌봐야 하는 많은 동생들이 있었고, 집안은 역시 찢어지게 가난했다. 둘은 합심하여 생을 이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소년은 선조들의 선산을 조금씩 팔며 생활을 연명하기 시작했다. 이제 부부가 된 그들은 읍으로 나가 매일매일 고된 일을 하며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 시작했다. 높은 언덕 위에 쓰러저가는 집이었지만 나름 따뜻했던 보금자리이자, 안심이 되는 쉼터였다. 그리고 잠시나마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다. 소년은 어느덧 청년을 자랐다. 17살이 되던 해에 첫아들을 낳았다. 늠름한 아들을 본 후, 청년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제 자식이 생겼으니 더욱 열심히 일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곧 징집제가 시작되었다. 그는 군대에 갈 나이가 되었던 것이다. 어수선한 분위기 사회 분위기였고 계속 일을 하며 가정을 지켜야 했지만 군대는 피할 수 없었다. 결국 해병대 초기 기수로 입대를 하고 순조로운 군생활을 마무리하고 복귀했다.
학교는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지만 청년은 참으로 똑똑하고 슬기로웠다. 머리가 좋았던 그는 수협에서 근무도 하고, 어업 조합장도 하면서 자식들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슬하에는 5남매를 두었다. 첫째가 중학교에 갈 즘 되어 섬마을 안에서 부둣가로 이사했다. 작은 섬이어서 중학교가 없어 본섬에 가야만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터를 잡아 한평생을 살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동생들도 출가하고, 자식들도 성장하니 이제 할 일이 생각났다. 그는 부모의 비극적인 죽음을 알리기로 한평생 다짐했다. 우선 아버지의 명예를 살기 위해 항일운동에 대한 활동 근거와 자료를 모으면서 끊임없이 국가를 상대로 건의했다. 그리고 동시대 아버지와 함께 활동했던 항일운동 투사의 집안을 설득해가며 모든 것을 기록하고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노력에 결실로 결국 신지도 작은 섬에는 작은 위령탑이 세워지게 되었다. 소년은 전답을 팔아가며 동생들과 집안을 지킨 보람을 느꼈다.
이제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을 회복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해서 당시 비슷한 사건들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선 지역 내 희생된 가정을 찾아다니며 설득하고 국가를 상대로 외로운 투쟁의 길을 걸었다. 완도에는 섬도 많아서 이 섬 저 섬을 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힘을 합쳤다.
제대로 된 돈벌이는 할 수 없었다. 이제는 어른이 된 청년의 아내가 집안을 책임지는 상황이었다. 아내는 매일 아침 물질을 하러 간다. 풍랑이 거센 바다에 들어가 굴도 따고 해산물도 캐는 해녀의 일부터 바닷가 그 여느 아낙 내와 같이 위험한 뱃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작은 밭을 빌려 깨도 심고 고추도 심으며 하루하루 버틸 뿐이었다. 그럼에도 자식들에게는 아낌없이 지원했다. 첫째부터 막내까지 모두 대학을 갔고, 어느덧 훌륭한 청년들이 되었다. 조금 살만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한 평생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다.
이제 중년으로 접어든 그는 힘을 합친 사람들과 함께 협심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벌였다. 그리고 모든 언론사와 기고문을 통해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밝혀진 나주부대의 민간인 학살사건이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 것이었다. 군인이 민간인을 상대로 학살을 자행한 사건이 밝혀졌고, 당시 그가 살던 완도뿐만 아니라 여러 도시에서 증언이 쏟아지고 있었다. 중년이 된 그는 제대로 된 배움은 없었지만 총명했고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흡입력도 있었다. 그리고 어디서든 그가 필요한 현장을 달려 나갔다.
국가를 상대로 첫 소송을 벌였단 그는 20여 년이 지나서야 국가를 대상으로 승소했다. 참으로 오랜 시간이 지났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받았다. 유족회장으로서 이제 그가 할 일은 다 했다. 비록 부모의 희생에 비해 얼마 되지 않은 보상을 받았지만, 이미 몸은 지칠 대로 지쳤다. 노쇠한 몸은 이상 신호를 내기 시작했고, 신장기능 이상부터 시작해 젊었던 신체는 어느덧 스스로 몸을 가눌 수 없는 노인의 몸이 되었다.
노쇠한 몸을 이끌고도 서울을 참 많이 다녀갔다. 배를 타고 들어가야만 했던 섬에서 멀디먼 서울까지 몇 번이고 그를 찾는 사람을 만나고 정부 인사를 만나며 부모의 희생, 더 나아가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고향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알리고 또 알렸다. 그러다 보니 건강한 몸은 고장이 나기 시작했고, 결국 칠순을 넘기자마자 병원에 입원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퇴원이라도 할라치면 또다시 서울을 다니며 자신의 뜻을 알렸다. 그렇게 병상투혼을 이어간 것도 10년이 넘었다.
승소를 하고 보상을 받았던 모든 돈은 고장 난 몸에게 다 지불되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병상에 누워 모든 비용이 병원비로 쓰였다. 자식들에게 부담을 지우기 싫다며 다행이라고 말씀하신 당신이었다.
2021년 3월 8일, 나는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 할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할아버지는 작년 아픈 몸을 이끌고 동네에 나가 병원을 가던 길에 낙상하여 뼈가 부러져 입원한 지 약 1년 만이었다. 그렇게 돌아다니지 말라고 말했지만, 답답하셨는지, 건강해지고 싶으셨는지 부지런히 움직이셨던 것이 탈이 났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로 인해 병원 방문도 안되고 전화도 안되어 걱정하고 있던 터였다.
할아버지는 평소에도 다정했고 나와는 특별하게 많은 대화를 했었다. 당신의 노쇠한 몸에 대한 걱정은 아랑곳없이 늘 내가 하는 일과 가족의 건강에 대해서만 물으셨다. 나는 할아버지와 말을 놓는 사이었는데, 할아버지는 평소에도 참으로 다정하고 친구 같은 분이셨다. 어릴 적 나에게도 할아버지는 당신의 부모님 그러니까 나의 증조부와 증조모에 대해서 이러한 사건에 대해서 자주 알려주셨는데, 네가 어른이 되어 이런 사실을 꼭 알아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국가를 상대로 승소를 하면서 기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재판 때문에 서울어 올라오셨던 적이 있는데, 2013년도였을 거다. 내가 아버지를 대신에 모시러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 갔는데, 평소보다 막히고 일이 좀 늦어져서 좀 늦게 도착했다. 할아버지는 늦은 시간 갈곳 없이 터미널 근처 길거리 건물 턱에 앉아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계셨다. 거대하게 느껴졌던 할아버지가 작고 쓸쓸하게 보였다. 그 이후 더 열심히 전화드리고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명절에는 꼭 내려가서 뵙고, 근처에 지방 출장이라도 있다면 잠깐이라도 짬을 내고 뵙었던 것 같다.
바로 다음날 새벽에 완도에 내려가서 장례를 치렀다. 계속해서 눈물이 났다. 고모는 하염없이 울었다. 고향 선산에 장지를 마련했다. 모든 절차와 과정을 마치고 돌아오며 할아버지의 일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근대사의 소용돌이 현장에서 외로이 투쟁하셨던 그 용기와 열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1935년생 위대한 사람의 찬란한 인생과 평범한 일상은 끝이 났다.
완도에서 올라온 김보희 씨는 아버지, 어머니, 형님, 누나, 삼촌 등이 학살당했다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남쪽으로 후퇴한 나주부대가 완도경찰과 지역의 유력 인사들의 밀고로 재판 등 최소한의 절차도 없이 완도지역 민간인들을 즉결 처형했으며 이 과정에서 1천여 명이나 희생당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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