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아이>는 1988년에 출판된 책이다. 한 인터뷰에서 레싱은 이 소설을 착안하게 된 사건 두 가지를 밝힌다. 하나는 빙하시대의 유전자가 우리에게도 내려온다는 한 인류학자의 글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 엄마가 네 번째 아이를 낳고 다른 아이들을 망쳤다고 하소연하는 글을 읽은 일이다.
영국인 부모아래 1919년 지금의 이란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짐바브웨에서 생활했다. 1949년 <풀잎은 노래한다>를 첫 소설로 <폭력의 아이들>, <황금 노트북>을 발표하고 2007년 그녀의 나이 88세에 노벨상을 받은 독특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다섯째 아이>는 크게 보면 인간의 이중성, 작게는 가족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가족의 신화는 더 이상 없어라고 한편으로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하는 나의 인생책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주변에서 보수적이고 답답한 사람, 수줍고 비위 맞추기가 어려운 사람, 비호감의 형용사가 끝없이 붙어 다니는 두 사람이 있다. 바로 해리엇과 데이비드이다. 60년대 후반 격변하는 영국사회의 문화에서 한발 떨어진 이들은 전통 방식의 가정생활을 꿈꾼다.
혼전 순결을 지키고 다복한 가정을 꿈꾸고(6~8명의 아이를 낳는 것) 아이들과 친척, 손님들을 위해 큰 주택을 구입하는 것, 휴가나 명절 때마다 가족, 친지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시간을 갖는 것, 자연의 섭리에 반하지 않기 위해 피임하지 않는 것 등이 그것이다.
따분한 직장 파티에서 이 둘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알아본다.
일의 목표가 '가정'이라는 데이비드지만 경제적인 도움 (데이비드의 부자 아빠 제임스)과 육아노동의 도움(해리엇의 엄마 도로시)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많은 아이를 낳는 것으로 행복의 기준이 설정되어 있는 이들 부부는 66년부터 74년까지 다섯 명의 아이를 낳는다. 그나마 첫째 루크, 둘째 헬렌, 셋째 제인, 넷째 폴 까지는 이 가정은 위태롭지 않았다. 아이들이 부부의 범주에서 정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다섯째 벤이 태어나면서 이 위태롭던 가정의 문제점이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다. 여름휴가, 부활절, 크리스마스 때마다 치르는 가족행사 비용을 전담하는 제임스의 불만이 터져 나오고 딸들의 아이들을 계속 돌봐야 하는 도로시도 결국엔 손을 들고 만다. 도로시에게는 3명의 딸이 있었고 둘째 딸 사라 역시 4명의 아이가 있었다.
해리엇과 데이비드를 은근히 비꼬고 조롱하는 사람 역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엮인 부류이다. '우리가 이 집안의 중심'이라고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항변하지만 경제적인 지원과 양육분담에 대해서는 독립적인 자세를 취하지 못한다.
의사들이 계속 이 아이는 정상이라고 말을 해줘도 해리엇은 믿지 않는다. 막내 폴의 손을 꺾고 개와 고양이가 죽는 사고가 일어나면서 벤은 가족 누구에게도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한다.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벤의 모습과 나중에 사춘기가 된 벤이 엄마 해리엇을 소외시키는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통쾌의 감정이 아닌 씁쓸함이 느껴졌다.
병동에서 데리고 온 후에 벤이 말썽을 부릴 때마다 다시 그곳으로 보내버리겠다고 협박하는 부분을 보면서 벤에게 가족은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길들여지지 않고 야생의 모습을 지닌 벤을 보면서 데이비드는 끝내 벤을 자신의 자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벤과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아이들은 이 집을 떠나게 된다. 루크는 친할아버지 제임스의 집으로 헬렌은 친할머니 몰리의 집으로 제인은 외할머니 도로시의 집으로 떠나고 이 큰집에는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해 예민하고 까칠해진 넷째 폴과 벤만 남게 된다.
영화내용을 묻는 해리엇에게 벤이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폴처럼 전 후 상황을 자세하게 말하지는 못하지만 나는 벤의 대답을 듣고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누나 헬렌이 "어떻게 지내세요? 벤"이라고 묻는 장면에서도 "고맙습니다". "괜찮아요"라고 대답해야지 하는 장면이 나온다.
해리엇이 폴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하게 하는 소위 인간화의 방식이 어떻게 보면 우리와 다른 존재들에게 하는 또 다른 폭력이 아닌가 싶다.
재독을 하면서 다시 느꼈던 건 형제, 자매, 부모가 강요하는 인간화를 빙자한 장면들이 나올 때마다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힘겹게나마 동조하는 벤의 모습에서 벤은 이렇게나 노력하는데 이들 가족은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벤에게 문제가 있었을까? 벤이 첫째 아이로 태어났다면 모두의 사랑을 듬뿍 받는 소중한 아이가 되었을 것이다. 임신과 육아로 몸과 마음이 바닥난 채 또다시 임신을 하게 된 해리엇,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에 치여 사는 가장이 된 데이비드.
오로지 행복한 가정이라는 허상 속에서 자신의 삶을 뭉개버린 사람들의 말로를 보여주는 것 같다. 어차피 때가 되면 자식들은 모두 떠난다. 여전히 그 큰 집을 고집하는 해리엇에게 얼른 팔고 데이비드와 편안한 노후를 즐기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 가족에게 벤은 또 다른 희생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이 무엇인지? 다름에 대한 인간의 폭력은 어디까지인지? 행복한 가족의 조건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다.
그녀는 완고하게 주장했다. "우린 행복해지려고 했어!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아니, 나는 행복한 사람을 만나 본 적이 결코 없어.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되려고 했지. 그래서 바로 번개가 떨어진 거야" p.159